“나는 알라만이 유일신이고, 모하메드가 그의 전령이라는 점을 증언한다. 신이 미국을 타격해 가장 큰 건물들을 파괴한 것에 감사한다. 전 미국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 신이 이슬람의 전위그룹을 이끌어 미국을 파괴했으니 신께서 그들을 (천국으로) 끌어올리기를 기도한다. 미국이 맛보고 있는 것은 지난 수십년간 우리(이슬람교도들)가 맛본 것에 비해서는 미미한(insignificant) 것이다. 우리 이슬람 국가들은 80년 이상 굴욕과 불명예를 당했다. 자식들이 피 흘리며 살해되고 성소가 유린당했지만, 누구도 듣지 않았고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칼이 80년만에 미국을 치자, 위선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모든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교의 승리를 위해 봉기해야 한다….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오고 이교도의 군대가 모하메드의 땅에서 떠날 때까지 미국이 평화롭게 살지 못할 것이란 점을 신께 기도한다.”
테러 발생 직후 빈 라덴이 발표한 성명 내용이다.
여기서 빈 라덴이 강조하는 ‘80년’은, 그를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서방국가들에 대한 증오의 기원을 암시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80년전 영국은 1차대전 중 독일편이었던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후방교란을 위해 전후 아랍인들의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했다(1915년 맥마흔 선언). 그러나 이 약속은 곧이어 프랑스·러시아와의 아랍분할통치밀약(1916년 사이크스 피코 협정)을 체결하면서 무효화됐고 영국은 1917년 유태인들의 지지를 얻고자 팔레스티나에 유태인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밸푸어선언을 발표해 버렸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때 그때 편의에 따라 말을 바꾼 영국의 이중적 외교로 이슬람의 통일국가 꿈은 좌절됐고 1922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이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된 후부터 대거 이주한 유태인들은 1948년 영국군의 철수와 함께 곧바로 독립을 선언했다.
빈 라덴은 바로 그 ‘오욕의 역사’에 대한 책임이 ‘이중계약’을 저지른 영국과 이후 지역의 패권을 승계한 미국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빈 라덴에게는 이스라엘의 안보를 핑계로 사사건건 중동문제에 개입하고 걸프전쟁을 전후해서는 친미 왕정국가들과 야합,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 공공연히 자국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이 ‘거대한 악’으로 비친 것이다.
빈 라덴의 발언은 ‘한때 서구문명을 압도했던 이슬람 문명이 쇠락의 길을 걷
게 된 데는 서구문명의 부정적인 영향이 컸고, 아랍문명의 단결과 옛 영화의 재현을 위해서는 반미·반서구 노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핵심 교의를 담고 있다.
빈 라덴의 말에 대응한 미국 대통령 부시의 생각도 분명하다. 세상을 ‘내 편 아니면 네 편’으로 가르고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아프간 공격을 ‘십자군 원정(crusade)’에 비유하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에 선전포고를 하듯이 “모든 나라들은 선택해야 한다. 이번 충돌을 놓고 중립지대는 없다. 무법자들과 양민 학살자들을 후원하는 정부는 역시 무법자와 학살자가 될 것이고, 위험을 무릅쓰고 외로운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양자간의 선택을 종용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미국 대통령들은 평화를 위해 일했다. 우리는 평화로운 나라지만, 갑작스런 비극으로 배웠듯이 돌연한 테러의 세계에서는 평화는 없다”며 이번 사태의 원인을 전적으로 외부에서 찾고 있다.
뉴욕 테러 발생 직후 전해진 부시와 빈 라덴의 발언은 하나의 사안에 대한 전혀 다른 입장 차이만을 확인시켜 준 셈이다.
여기서 한번만 뒤집어 생각한다면 부시 대통령과 빈 라덴의 사고방식은 같은 것이 된다. 독일 공영 제1 ARD방송의 뉴스 앵커 울리히 비커트도 “부시가 살인자나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협량(狹量)하다는 점에서는 빈 라덴과 사고방식이 똑같다. 서구국가들이 이번 테러의 근본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빈 라덴은 미국 대통령의 어두운 도플갱어(doppelganger·제2의 자아)”라는 한 인도 작가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빈 라덴과 부시의 ‘테러전쟁’을 위한 ‘성명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문명과 문명간의 뿌리깊은 증오를 보복으로 해결하려는 강경론 앞에 근본적인 해결책은 발견할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의 회색동굴을 뒤져 빈 라덴 하나 잡아죽인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진정한 적수가 없으면 진정한 동지도 있을 수 없다. 우리 아닌 것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 것을 사랑할 수 없다. 이것은 백년이 넘도록 지속돼온 감상적이고 위성적인 표어가 물러간 자리에서 우리가 고통스럽게 다시 발견하고 있는 뿌리깊은 진리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 정신적 유산, 문화, 타고난 권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이것은 사소하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다.”
‘문명의 충돌’의 저자 새뮤얼 헌팅턴이 인용한 딥딘이라는 소설가의 말이다. 헌팅턴은 이미 어떠한 형태로든 문명과의 충돌을 예측하고 있었다. 지금 미국은 이번 전쟁이 문명의 충돌이 아닌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이라고 그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지만, 헌팅턴이 예측한 ‘문명의 충돌’ 범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그 충돌은 구조적인 것이기에 세계 역사를 회색빛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폭발력을 갖고 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을 쓰게 된 동기도 이런 두려움을 방지하기 위한 서구문명의 자구적 시도였지 않은가.
필자는 몇년전 뉴욕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전망대를 오르고, 월스트리트를 거닐었다. 물과 지형 등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도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활기차고 다양한 도시, 21세기를 대표하고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어 필자는 이란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기회라기보다는 이란에서 부흥했던 조로아스터라는 종교에 대한 취재여행이었다. 그 여행 중에 시라즈를 들렀다.
페리스폴리스. 다리우스 왕조가 일으킨 페르시아제국의 수도였다. 페리스폴리스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쌍둥이 석조물. 사람의 얼굴을 조형화하지 않는 이슬람에 의해 얼굴 부근은 많이 훼손돼 있었지만, 설형문자로 ‘만국의 문’이라고 명명된 그 쌍둥이 문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견줘 봤을 때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페리스폴리스의 흔적 하나하나에서도 지금의 뉴욕에 결코 뒤지지 않는 위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이 국교로 신봉했던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애착도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서구문명의 기본으로 자리잡고 있는 종교에 대해 결코 뒤지지 않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페르시아제국의 역사가 긴 역사의 흐름으로 봤을 때 일시적인 문명이었다면, 지금의 서구문명도, 이슬람 문명도 결코 영구하
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영구하지 않은 서로 다른 문명간의 갈등을 완화할 방법은 없는가.
세계 역사를 회색동굴속으로 함몰시키지 않고 서로의 문화와 문명을 존중하면서 한데 어울려 살아가게 할 매체는 없는 것인가.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있는 정보통신매체가 그 답은 아닐까.
모든 언어를 하나의 솔루션으로 바꿔 공통적인 언어를 만들어내고, 상업적이지 않은 정보통신시설의 확충을 통해 무제한적인 대화를 나누고, 그 대화를 통해 진정한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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