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만 해도 임형규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문 사장(48)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물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현실이 따라주지 못한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삼성전자는 IMF 직후 부천공장을 매각함으로써 비메모리 관련 인력을 상당수 잃었다. 전용공장(FAB)도 없어 사업에도 차질이 많았다. 부천공장은 그가 처음 삼성전자에 입사해 일한 곳이기도 하다.
“회사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부천공장 매각으로 연구개발자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진 게 사실입니다. 그들로선 회사에서 그리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고 충분히 오해할 만하죠. 그들에게 뭔가 희망을 줘야 하는데….”
지난해 8월 천안에서 열린 반도체설계세미나를 마치고 한밤중에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그는 이렇게 한숨을 내쉬었다.
1년 뒤 그의 표정은 딴판이다.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세계 유수의 반도체업체들도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데 올해 삼성 비메모리 분야는 20% 이상 성장하고 있다. 시황 탓에 주춤하기는 했으나 온양에 비메모리 전용 FAB도 짓고 있다. 무엇보다 연구개발자들 사이에 ‘할 수 있다’는 의욕이 넘친다.
임 사장과 그의 후배 연구원들은 90년대 초 일본의 메모리반도체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밤샘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하다.
“임직원들 사이에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자신감은 다른 어느 것보다 귀중한 자산입니다.”
임형규 사장은 삼성반도체 신화의 주역이다. 지난 84년 수석연구원으로 비휘발성메모리와 S램 개발을 주도했다. 또 90년대에는 개발과 사업을 총괄하면서 메모리사업을 확고한 세계 1위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임 사장은 그 신화를 이제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이루려 한다.
이미 비전도 내놨다. 스마트카드·LCD구동칩·이동통신단말기용 칩 등 일류 품목을 육성해 오는 2005년엔 매출 50억원, 2010년엔 200억달러를 달성할 계획이다. 4년 뒤 세계 10위권 진입이 1차 목표다.
“이 사업이 워낙 다양합니다. 몇 개 분야를 선정해 자원을 집중해야 하는데 일단 국내 시장이 커 미래 핵심기술 분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특히 임 사장은 국내 벤처설계기업들의 힘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벤처기업 사장들과 여러 번 만나 얘기해봤더니 요구사항이 다양했습니다. 일거리를 달라는 사장도 있었고, 삼성이 대신 팔아달라는 제의도 있었습니다. 지적설계자산(IP)를 공유하자는 의견도 있었죠. 어떤 형태로든 서로 이익이 되는 쪽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그러면서 임 사장은 “국내 벤처설계기업들의 기술이 대체로 응용기술에 치우쳐 한 아이템만 하면 이후에 변신하기 힘들다”며 “되도록 기본기술에 바탕을 둔 아이템 발굴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사람들은 처음 임형규 사장을 만나면 ‘대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기 쉽다. 워낙 말수가 적고 신중한 데다 무뚝뚝하기까지 하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이다.
그런데 여러 번 만나보면 느낌이 달라진다. 남을 배려하는 세심함과 따뜻함이 배어나온다. 한마디로 ‘소프트’하다.
이런 그의 성격이 연구원들에겐 어필하는 모양이다. 맏형처럼 챙겨주고 격려해줘 사장이 아닌 선배와 함께 일한다고 여긴다.
그에게 요즘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가격폭락으로 메모리반도체사업이 어려움을 겪자 회사 안팎에서 비메모리반도체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높아진 것이다.
“관심이 많아진 것은 좋은데 비메모리반도체는 하루아침에 ‘뚝딱’ 하며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꾸준하고 인내력있게 기다려야 하는 게 바로 이 사업입니다.”
그러면서도 임 사장은 “원래 우리 회사가 이 사업을 강화해왔는데 앞으로 더욱 힘이 모아질 수 있게 됐다”며 최근 높아진 관심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섭렵한 그에게 두 분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메모리가 내부지향적이라면 비메모리는 외향적인 성격이 짙습니다. 메모리는 핵심기술을 개발해 잘 생산만 하면 일단 성공하나 비메모리는 시스템업체는 물론 설계전문회사 등 외부와의 잘 협력하지 않으면 사업 자체가 힘들죠.”
임 사장은 “그렇지만 지속적으로 연구개발하고 혁신해야 하는 점에서 두 분야는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더딘 것 같지만 확실한 ‘황소걸음’이 목표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를 만날 때마다 ‘내부역량 강화’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듣게 된다.
“밀린 숙제가 많습니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요. 바깥에서 구할 수 있으면 안에서 굳이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임 사장은 조직 장악력이 뛰어난 경영자다. 일단 목표를 명확히 해 조직적으로 접근해 달성하는 능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년 반 동안 그는 새로운 목표도 세웠고 조직도 재정비했다.
삼성전자의 위치를 고려하면 그와 그의 임직원들이 앞으로 어떤 결실을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국내 비메모리반도체산업의 미래는 달라진다.
임형규 사장의 일거수 일투족에 산업계의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가 생각하는 성공 비결은 단순하다.
“개발 환경·시장 등의 현실적인 여건도 중요하나 무엇보다 성공에 대한 확신과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임직원들은 삼성 차원을 넘어 한국의 비메모리산업의 꽃을 피워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약력>
△53년 경남 거제 출생 △76년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78년 한국과학기술원 전기전자공학과 석사 △84년 미국 플로리다대학 전자공학 박사 △88년 정진기 언론문화상 과학기술부문 대상 수상 △91년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위원(이사), S램/NVM 개발총괄 △94년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위원(상무), 메모리 설계총괄 △95년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위원(전무), 메모리 개발총괄 △97년 삼성전자 반도체 전무, 메모리 본부장 △98년 한국과학기술원 ‘올해의 동문상’ 수상 △99년 삼성전자 반도체 부사장, 메모리 개발사업부장 △99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2000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사장, 시스템LSI 사업부장 △2000년 무역의날 무역진흥의 유공 ‘금탑산업훈장’ △2001년 3월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장 사장 △논문 26편:해외 주요 반도체 학술지 논문 22편 포함 △취미:등산·골프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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