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팹(FAB) 하나 짓는 데 수조원이 들지만 인력 1000명을 뽑는 데엔 고작 2000억∼3000억원이면 됩니다. 비메모리 분야에선 FAB보다도 인력 투자가 더욱 중요합니다.”
임형규 삼성전자 시스템LSI부문 사장은 지난달말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비메모리사업의 본질을 꿰뚫은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산업이 위기라고 하는데 진짜 위기는 인력에서 비롯된다.
벤처붐이 일던 시절 공대생들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연구를 ‘3D’업종이라고 불렀다. 월급은 많이 받을지 몰라도 밤샘 연구도 해야 하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많아 피곤하다는 얘기다.
이러한 말도 최근 기업들이 고용을 축소하자 쏙 들어가기는 했으나 인터넷 붐이 일면 언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른 일이다. 공대생이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를 연구한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갈 곳은 몇개의 국내 대기업 연구소가 전부다.
갈 곳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연구 의욕도 예전 같지 않다. 현재 업체들의 부장급 이상들은 세계 일등을 목표로 향해 뛰었으나 20대 젊은 연구진은 더 이상 이같은 목표도 없다. 다만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능력을 인정해줄 경우 선배들 이상으로 열심히 연구하지만 예전과 같은 목표의식은 떨어진다는 게 연구소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대기업에서 일하기보다는 창업하기를 원하는 게 요즘 젊은 연구개발자들이다.
최근 20∼30대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벤처 창업이 활발한 것도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다.
이러한 추세를 현실로 받아들여 긍정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대기업에서 현장 경험을 쌓도록 하고 분사 등을 통해 벤처기업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대기업 위주의 반도체, 디스플레이 산업 정책을 설계와 부품, 소재장비 분야의 벤처 기업 중심으로 다시 짜야 이 분야로 인력이 몰려들어 산업 전체적으로 인적 기반이 견실해진다고 지적한다.
저변 확대와 병행해 무엇보다 소수의 우수 인력도 집중 양성해야 한다.
채수익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기술 개발이 한계에 이르면서 기술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으며 이를 자유자재로 구현할 인력은 어느 나라나 적다”면서 “자질있는 학생과 연구원들을 선정해 집중 지원함으로써 상위 집단만이라도 대외 경쟁력을 갖춰야만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자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현재 반도체 FAB을 갖고 있는 대학은 서울대와 KAIST 정도다. 그나마 시설이 노후해 급변하는 기술 추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 자체로는 투자 여력이 없다.
기업들이 대학에 연구 프로젝트를 주는 것도 중요하나 이러한 시설투자를 특정 대학이나 연구소에 집중하거나 공적 시설을 확충해 누구든지 마음놓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인력 수급에 대한 정확한 예측도 가능해야 한다. 업계 인사 담당자들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인재가 어느 곳에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다면서 “한국보다는 미국에서 사람 찾기가 더욱 쉽다”고 말했다.
반면 대학 교수들은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도 사람마다 제각각이어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기업에서 필요한 인재 육성만이 꼭 좋은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실무능력을 강조할 경우 전문대학을 중심으로 가면 될 것이고 반도체 핵심을 연구하는 고급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선 대학원 중심으로 가야 한다. 이같은 유연한 교육과정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교육제도뿐만 아니라 사회분위기도 변해야 한다.
글로벌한 시대에 맞게 해외 현지 인력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국내에서 제대로 연구되지 않는 분야의 경우 해외 대학, 연구소와 제휴해 앞선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다.
외국에 연구소를 세울 필요도 있다.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이 유럽의 스마트카드칩 시장을 겨냥해 현지에 시장 및 기술 연구소를 세운 것은 현지화 전략 차원에서 바람직한 조치다.
우리 반도체, 디스플레이 산업이 내세우는 강점은 공정기술. 그런데 공정기술은 사람보다 설비 투자가 더욱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공정기술을 넘어 설계나 부품, 소재 등 핵심 기초기술로 영역을 넓히려 한다. 이들 기술은 사람의 머리속에서 나온다.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산업 위기 극복의 해결책은 바로 사람에게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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