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불법적으로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은 맨 먼저 거문도 정상에 그들의 국기를 게양했다. 이어 방파제를 만들고 해저 통신케이블을 포설한 후 섬 주민들과 유대를 강화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쟈 그라핀’의 1887년 2월 12일자에 실린 거문도 특집에도 당시의 상황을 소개하고 있는데, 병사들의 숙소 2동이 세워져 있고 식당과 병원이 세워져 있었으며, 닭과 같은 가축도 사육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과의 관계도 상세히 나타나 있다. 섬에 병자가 발생하면 군의가 진찰하여 치료까지 해주는 등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영국군의 이러한 시도는 거문도를 제 2의 홍콩으로 만들고자하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거문도를 점거한 직후인 1885년 5월 11일자 ‘홍콩타임스’는 “우리정부(영국)가 이 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곳을 요동 제 2의 홍콩으로 발전시킨다는 의미는 아주 크다”고 논평하는 것을 보면, 영국으로서는 거문도를 상당기간 점령하고자 했던 의도를 감지할 수가 있다.
그러나 1885년 당시 국제정세는 영국의 생각과는 반대로 움직였다.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한 나라는 러시아. 러시아공사 웨베르는 조선왕조를 움직여 러시아도 조선반도의 동해안에 있는 원산을 포함한 영흥만을 점령할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청국을 통하여 영국함대의 거문도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러한 강경한 반대에 직면한 영국은 할 수 없이 청국과 교섭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의 중재를 맡았던 청국은 처음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방치했다. 그러나 조선문제에 영향력을 가진 북양대신 이홍장이 강하게 반대했고,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태도를 일변, 5월 3일자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전보를 영국으로 보냈다. 더구나 이홍장은 부하인 정여창 제독에게 명령하여 북양함대를 조선에 출동시켜 조선측에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엄세영, 뮐렌도르프 두 사람을 청국 군함에 태워 거문도까지 보내주었다.
당시 일본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점령당시 일본신문의 논평이 고심한 입장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시사신보’는 “러시아는 조선의 제주도에 주목하여 일시 이를 점령하든 아니면 영구적으로 이를 탈취할 입장이며, 또 영국은 이 시점에 조선 제주도의 동북쪽에 있는 거문도에 국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영국은 오로지 군사용 석탄을 준비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에 조회하여 이 섬을 차용하려 한다는 설도 있는데, 이를 차용하던 이를 점령하던 간에 처음의 명목과는 달리 영국군함이 섬 주변에 자주 왕래출입하고, 해병의 위세를 주위에 발산하는 것은 세력과시임이 분명하다. 또한 거문도의 지리를 살펴보면 일본과 40리 정도로, 부르면 대답할 거리에 불과하다. 즉 우리 땅에서 불과 40리 떨어진 섬에 이미 영국기가 휘말리고 있으니 적지 않게 의심이 가며, 그 깃발이 언젠가 40리 떨어진 우리 땅에 이식되지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일본은 이 같은 사정을 알아서 다른 나라에 기대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영국해군의 거문도 점거에 대한 위기감을 표현하고 있다.
일본과 영국은 이미 동맹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고, 그 후 청일전쟁 때에 영일통상 항해조약, 러일전쟁 직전에 영일동맹을 맺어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는데, 결국 영국의 거문도 점거는 조선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영국, 청국과 러시아 등 열강세력의 각축 현장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한편, 영국군이 거문도 점령 뒤 한달 가까이나 지난 후에, 그것도 청국으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들은 조선정부에서는 급히 엄세영, 뮐렌도르프 두 사람을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에 착수했다.
엄세영, 뮐렌도르프 두 사람이 영국해군의 책임자인 맥클레이 함장과 만나 나눈 구담의 내용이 ‘고종실록’ 음력 1885년 4월 3일(양력 5월 16일)자에 기술되어 있다.
“5월 16일 엄세영, 뮐렌도르프 두 사람은 영국 함대에 승선하여 함장인 맥클레이와 만나 설명을 들을 때, 영국국기를 산 위에 세운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답을 나누었다.
문:중국의 군함도 영국 국기가 산 위 나무에 날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왜 이런 짓을 했는가.
답:깃발을 세운 것은 우리 수사제독(동양함대사령관장관)의 명령이다. 영국정부의 정보에 의하면 러시아가 이 섬을 탐낸다고 한다. 러시아와 영국은 전쟁상태에 있어 기선을 잡기 위해 여기에 왔다.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보호를 위해서다.
문:조선과 영국은 사이가 좋지만 조선과 러시아간 똑같이 우호관계에 있다. 이제 영국군함이 조선 땅에 갑자기 와서 마음대로 자기 국기를 세우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즉시 귀국 정부에 연락하여 선처하기 바란다.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 각국 공사에게 사정을 모두 말할 것이다.
답:우리는 현재 조선의 매우 곤란한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영국정부에는 보고하지만, 우리 수사제독이 일본의 나가사키에 있기 때문에 의문이 있으면 그곳에 가서 물어보기 바란다.
문:어떻든 영국 국기가 조선의 땅에 펄럭이고 있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우리는 조정에 상주하여 영국정부와 교섭하겠다.
답:모레 함대의 장교가 나가사키에 가니까 오늘의 일을 수사제독에게 보고하겠지만, 5월 14일 입수한 전보에 따르면 영국정부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러시아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고 한다.”
여기서, 조선정부에서 파견한 엄세영과 뮐렌도르프가 영국해군의 불법점거에 항의하기 위해 거문도에 도착한 때 이미 거문도와 홍콩간에 해저전신선이 가설되어 있었던 것을 위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이 거문도를 영구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과정에서 통신시설의 확보를 얼마만큼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실이다.
당시 거문도와 상하이를 연결한 해저 통신케이블은 전신 통신을 수행하기 위한 1회선이었다. 현재 해저 통신케이블은 바다 속을 얼마간 파낸 후 케이블을 포설한 뒤 다시 덮어 조류와 어선의 피해를 최소화 하지만, 당시 포설된 해저 통신케이블은 바다 밑에 그대로 포설한 케이블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영국군이 포설한 케이블은 영국군 철수 후 자연스럽게 사용이 중지되었고, 현재 거문도에는 어선의 그물에 걸린 해저 통신케이블을 건져 올려 고철로 활용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거문도는 이후 일본군이 진주하여 일본과의 해저 통신케이블을 가설하여 사용한 흔적이 있고, 이후 발행한 러일전쟁 당시에도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적함발견’이라는 무선전보가 중개된 곳이었고, 현재에는 국제 해저 통신케이블 대부분이 바다 속으로 지나치는 곳으로 통신의 요충지가 되고 있다.
영국 해군은 거문도를 점령한지 2년 후인 1887년 2월 27일에 철수했다. 그 동안 조선정부의 거듭된 항의와 청국의 중재결과였다. 당시 영국은 청국의 주선으로 어떠한 나라도 조선의 영토를 점유하지 못한다는 다짐을 러시아로부터 받고 난 후 철수했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했다는 보고에 조선정부는 경략사(經略使) 이원회를 보내어 그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이원회는 복명서를 통해 전선 1조가 전신국으로 매몰되어 있고, 그것이 상하이로 통하는 해저전선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미 중단된 상태라고 보고했다.
거문도. 우리나라 남해 관문의 아름다운 섬. 하지만 당시 조선은 그 섬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섬이 점령당했는지도 한 달 동안 모르고 있었다. 영국해군의 해저 통신케이블 가설에 대한 허가도 청국으로부터 사후허가 형식으로 받았다. 그리고 2년 가까이 우리의 섬에 영국 국기가 펄럭이는 것을 방치시킬 수밖에 없었다.
떠나가는 영국해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다는 섬 주민들에게 역사는 어떤 것인가. 아직도 거문도 해안가에 남아 있는 그 역사의 흔적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 것인가.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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