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6)원세개와 가짜 전보<상>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이 가설된 이듬해인 1886년 7월 15일. 조선에 부임해 있던 청국의 주한 총리 원세개(袁世凱)는 조선의 대신과 각 영사를 자기의 공관으로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면서 모인 사람들에게 한장의 전보문을 제시했다.

 ‘청국정부는 한·러 밀약설에 대해 문죄하기 위해 금주(金州)의 72영이 오늘 배를 타고 조선의 왕경을 향해 출발했다.’

 당시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조선의 정세로 보아 경악을 금치 못할 대 사건이었으나, 그것은 원세개가 조작한 가짜 전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가짜 전보임을 아는 사람은 그 연회장에 아무도 없었다.

 원세개가 조선에 처음 나타난 것은 24세 때인 임오군란(1882년) 때였다. 그 뒤 조선의 신식군대를 훈련시켰고, 갑신정변 때에는 군사를 일으켜 김옥균이 주축이 된 정변세력을 제압하고 척족 정권을 부활시켜 스스로 그들의 지주임을 자처했다. 이러한 사항이 북양대신 이홍장의 눈에 들어 조선 주재 청국 관헌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된 원세개의 그때 나이 27세. 그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청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의 궁내부 대신인체 하며 일상 생활에서 주택과 마차, 장신도구에 이르기까지 조선 국왕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대궐에 출입할 때에 다른 나라의 외교사절들은 궐문 밖에서 내려 국왕이 있는 전각까지 보행하는 것이 상례였는데도 원세개는 승차한 채 하인배까지 거느리고 제멋대로 출입하는 횡포를 부리곤 했다.

 이 와중에 조선 정부에서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전달한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 육성해줄 것과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타국과 일률평행(一律平行)하도록 지원해 주되, 만일 청국이 이를 수락하지 않는다면 군함을 파견하여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는 서한이 문제가 된 제 2차 한·러 밀약설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1884년의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의 세력이 대립한 가운데 러시아와 영국이 등장하면서 조선을 둘러싼 주변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1860년에 청국과의 베이징조약으로 연해주 지방을 차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된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건설하고 이 곳을 발판으로 하여 동양진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세력확장은 1886년 조선과의 통상조약에 따라 공사로 부임한 베베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뛰어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궁중과 정부안에 친러 세력을 심어 러시아의 세력을 크게 한 뒤, 함경도 경흥을 그들의 무역지로 문을 열게 하고, 두만강을 배로 드나들 수 있는 운항권도 얻었다. 러시아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후에 청국이 조선의 내정에 지나치게 간섭하여 정부안에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러시아 세력의 한반도 남하는 청국과 일본 두 나라 모두 반대하는 일이었다. 특히 세계 여러 곳에서 러시아와 대립하던 영국도 반대편에 가담하여 해군 함대를 파견, 대한해협의 중요한 지점이며 러시아 동양함대의 길목인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고 포대를 쌓아 군항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조선정부가 러시아공사에게 보낸 비밀 서한의 내용을 원세개에게 알려준 사람은 척신의 한 사람이었던 민영익이었다. 갑신정변 당시 수구파의 거두로서 맨 처음 자객의 칼에 맞았던 민영익은 그 사실을 알고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고민하던 민영익은 원세개를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려주면서 비밀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고, 원세개는 민영익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청국측에서 관리하고 있던 전신선을 이용하여 가짜 전보를 만들고 이를 활용하여 조선 정부와 각국 공사들에게 공갈, 협박을 시도한 것이었다.

 원세개의 가짜 전보가 공개되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대신과 영사들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은 곧바로 국왕에게 보고되어 왕실 전체가 크게 놀라 군대에 비상 경비령을 내리는 등 소란을 피웠고, 이에 장안의 인심은 매우 흉흉해졌다.

 이 사건 이전부터 원세개는 비밀 전보를 이용하여 북양대신 이홍장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 인천과 서울, 의주를 거쳐 청국까지 연결돼 있던 전신선을 관리하는 한성전보총국 총판 진윤이를 통하여 전신선을 감독하는 척 하며, 조선의 내정과 각국 공사관의 정보를 수집하여 활용하였으며 북양대신 이홍장도 진령(陳令)이라 하여 한성전보총국 총판 진윤이의 정보를 수시로 전보로 받아 조선의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원세계의 가짜전보로 인해 장안의 인심뿐만이 아니라 조선에 상주하고 있는 각국 공사들도 혼란에 빠졌다. 원세개는 가짜 전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혼란까지 계산에 넣고 정치 연극을 펼친 것으로, 이튿날 직접 국왕을 알현하고 ‘청국 대군이 오기 전에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들을 속히 숙청하여 편이하게 일을 수습할 수 있도록 하라’고 위협하였다. 뒤이어 서리 외무독판 서상우를 불러 세우고는 조선정부의 군신 상하가 비위, 불법 행위를 감행한다고 언성을 높여 면박하는 한편, 대원군을 조대비와 홍대비에 보내서 국가의 안위와 이해를 호소하게 하였다. 이에 국왕과 왕비는 크게 당황하여 영의정 심순택과 판중추부사 김홍집, 서리 외무독판 서상우 등과 함께 긴급히 상의한 다음 그들을 직접 원세개에게 보내어 변명하게 하였다.

 ‘인아 정책은 국왕 및 정부대관이 전혀 아는 바 없고, 반드시 간사한 못된 무리들의 협잡이요, 문빙(文憑)과 국새, 도서 등은 위조일 것이다’는 변명에 원세개는 문책하는 태도로 소인배의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고 또 러시아 공사관에서 문제의 문서를 찾아올 것을 요구했다.

 조선정부는 같은 해 7월 17일 사건의 연루자인 죽산부사 조준두를 전라도 담양으로, 내무주사 김가진을 남원으로, 김학우를 순천으로, 김양묵을 평안도 중화로 귀양보냈다. 당시 귀양간 사람중에 김학우란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 가설에도 참여했던 전신 기술자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어 러시아 공사관에 문제의 문서 반환을 교섭하였으나 베베르 러시아 공사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부인하고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4명을 유배한 데 대하여 ‘타국의 간섭을 받아 무죄한 사람들을 벌주는 법도 있느냐’는 조회문을 발송해 왔다.

 원세개는 러시아 측이 문서를 반환하지 않는다면 조선 정부에서 별도로 문서를 발송, 전날의 문서는 국왕이나 정부가 전혀 모르는 것이므로 백지화시킬 것을 석명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원세개는 7월 21일에 전보로 북양대신에게 조선의 국왕이었던 고종을 폐립시키고 대원군 세력을 끌어 들여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원세개가 이처럼 절대적인 횡포를 부릴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의 하나는 통신의 장악이었다. 원세개는 사건이 나기 바로 전 해 가설된 조선과 청국을 연결한 전신선을 청국의 한성전보총국에서 운영하고 있는 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통신, 즉 전신선을 활용하여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정보를 신속히 보고하고 조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며, 가짜 전보까지 조작하여 조선의 국왕을 갈아치우려는 횡포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국왕은 문서 송달자 채현식을 죽여 입을 막음으로써 증빙을 은익하고, 러시아의 군대가 도착할 때를 기다리려고 한다. 그러나 문서에는 국왕의 국새가 있으니 장차 어찌할는지 알 수 없으며, 귀매(鬼魅)한 상황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이제 신민은 서로 다투어 온 나라가 물 끓듯 하니 만약 500의 병력만 있다면 국왕을 폐한 후 군소 잡배를 잡아 천진으로 보내서 신문을 받도록 하겠다.’

 원세개가 이홍장에게 보낸 비밀 전보의 내용이다. 조선의 돈과 땀으로 가설된 전신선으로 조선의 국왕을 폐하는 내용의 전신이 전달된 것으로, 현재 정보통신이 주축이 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경각심과 한편으로는 안도와 자신감을 느끼게 한다.

 단 500의 병력으로 조선의 국왕을 폐할 수 있다고 한 원세개에 관한 내용과 가짜전보 이후의 내용은 다음 호에 거론한다.

 

 

 김영근: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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