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1세기 지식기반 정보사회에 대비해 국가과학기술의 미래운명을 걸고 지난해부터 본격 추진하고 있는 21세기 프런티어연구개발사업. 과제당 연간 100억원의 연구비가 10년동안 지원되는 이 사업은 과학기술계 연구원들로부터 매번 사업단장 선정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연구개발책임자인 사업단장을 먼저 선정하고 연구개발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톱다운’형식의 연구개발 방식에서 벗어나 ‘보텀업’방식을 지향하는 등 연구개발 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이 사업은 이제 부작용보다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사업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연구비의 절반 이상이 외국으로 새어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이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 대당 1억원 이상 호가하는 유전자분석기를 외국으로부터 들여와야 하고 시약 등 각종 실험기자재 역시 유전자분석기 전용으로 옵션에 묶여 값비싸게 들여와야 하는 실정이다. 게놈분석을 통해 위암·간암 등 한국인의 질병원인과 치료제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 연구사업은 국내에 기초연구자료는 물론 각종 실험기기와 시약 등이 전무해 연구비의 60% 이상을 외국에 내주고 있다. 연간 100억원의 연구비가 투입되지만 실제적으로 국내 연구진의 직접연구비로 쓰이는 규모는 인건비·간접비 등 40억원이 채 못된다는 얘기다.
이같은 현상은 왜 발생하는 걸까. 연구개발의 가장 기본요소인 연구장비와 각종 시약 등 실험기자재의 국내 투자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과학기술계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우리나라가 국가 연구개발사업에 연간 쏟아붓는 전체 예산은 3조8000억원 이상 된다. 이 가운데 외국인 과학자들에게 지불하는 순수 연구과제용역비를 제외하고도 30% 이상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과학기술계는 추정하고 있다. 정부부문만 이 정도 규모이고 여기에 연간 10조원 이상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하고 있는 민간부문까지 더하면 연간 3조원 이상이 실험장비 구입이나 시약 등 실험기자재 구입비용으로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게 연구계 관계자들의 진단이다. 연구과제 수탁을 통해 외국 과학자들에게 지출되는 비용의 경우 연구결과라는 대가가 있지만 연구장비의 도입은 그야말로 외국 장비업체만 살찌우는 결과를 가져다 주고 있다.
연구개발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연구장비의 확보인데도 우리나라의 경우 기초과학부문 연구과제 가운데 연구장비개발 사업은 그야말로 ‘가뭄에 콩나기식’이다. 정부가 연구장비개발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과제는 △초고압 투과 현미경 개발사업(40억원) △비행체핵심시험장비사업(4억원) △진공기술기반구축사업(30억원) △중전기기연구기반구축사업(70억원) 등 고작 144억원 정도다. 게놈연구사업 등 연구장비 확보가 필수적인 생명공학, 나노기술 개발 관련 장비개발예산은 처음부터 아예 반영조차 되지 않고 있다.
원로과학자인 K박사는 “기업의 생존이 생산공정 개선에 달려 있듯 국가의 연구개발 경쟁력도 원천연구장비 개발·확보에서 비롯되고 있는데도 정부가 개발효과나 시장성 등을 이유로 연구장비 개발 투자에는 인색하다”고 말하고 “시장성이나 투자효율성 면에서 외면하고 있는 첨단 연구장비의 경우 국가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국가가 개발을 전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어느 회사, 어느 국가 제품을 구입하느냐만 알아도 연구개발성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어 귀중한 연구개발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TFT LCD, 반도체, 한국인의 유전체 관련 연구개발전략이나 성과 등을 경쟁국에 노출시키지 않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독자적인 연구장비 개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정부의 고위관계자는 “우리나라가 프런티어연구개발사업에 착수하기 전 이미 외국 대학 등에서 관련 연구개발에 착수, 상당부분 성과를 보이고 있는 연구장비를 도입하면 연구기간을 단축하는 효과가 있고 투자효율성에서도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장비 개발업체인 W사의 K사장은 “국내에 전문기업들이 많이 있고 대부분 사명감을 갖고 연구장비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데도 정부와 연구계가 국산이라는 이유로 기술수준까지 무시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K사장은 또 “핵융합연구사업인 ‘KSTAR프로젝트’의 경우 초전도 자석 등 대부분의 장비 개발에 국내 전문업체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정창훈기자 chj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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