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4)갑신정변과 최초의 전신선<2>

의주전선합동(義州電線合同).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 가설을 위해 1885년 6월 6일(음력) 조선정부와 청국정부가 맺은 조약의 명칭이다. 하지만 이 조약은 국가와 국가간의 평등한 조약이 아니다.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조선 정부의 붕괴를 막아준 대가로 청국이 다른 열강에 앞서 이권을 침탈하기 위한 일방적 문서일 뿐이다.

 제1조. 중국전보국은 북양대신이 조선왕국의 제청에 의해 상소한 바에 따라 인천·한성·의주를 거쳐 봉황성에 이르는 육로전선을 가설하고 그 경영을 맡기로 한다.

 제2조. 전선 가설을 위해 중국전보국이 10만냥의 차관을 제공하되 5년 거치 후 20년 기한으로 매년 5000냥씩 무이자로 상환한다.

 제3조. 전선 개통 뒤 향후 25년간은 육지와 바다 전신선의 부설권을 타국정부나 각국 공사에 대여하지 못하며, 조선정부에서 전선의 확충과 증설 시에도 반드시 중국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제4조. 전선가설에 필요한 일체의 재료 기기 및 기술자와 종사원의 봉급과 식대·여비 등은 모두 차관 금액 중에서 지급하고 전주(電柱) 및 그 매립에 소요되는 인부는 조선정부에서 제공하되 그 비용을 지급하지 아니하며, 공사에 필요한 일체의 자재에 대해서는 수입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제5조. 시설의 운영과 관리는 기술상 숙련공이 아니면 어려우므로 차관을 상환할 때까지는 일체 중국전보국에서 관리를 대리하고, 전선의 사용빈도가 적어 수입이 많지 않을 경우에는 경상유지비를 조선정부가 지급한다.

 이밖에 전선가설의 착공과 더불어 전선이 지나치는 지방관에게 이를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을 요망하는 내용 등 총 8조로 되어있다.

 우리 글은 보내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는 전신선을 청국의 조선에 대한 군사적 통제 방안으로 가설하면서 우리 돈, 우리 선산의 나무와 땀을 제공하는 조약이었다. 특히 차관을 다 상환하는 25년 동안 조선 내의 전신선 가설에 대한 모든 권리를 청국이 가진다는 내용과 조선정부의 자체적인 전신선 가설 시에도 반드시 청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21세기의 사회라면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빼앗기는 것과 같은 치욕적인 내용으로, 당시 혼란이 극에 달했던 조선 정부에서는 혼이 나간 채 정보통신의 주권을 송두리째 넘겨주고 만 꼴이었다.

 아무튼, 청국의 독촉과 함께 조선정부는 조약에 의한 내용대로 가설준비를 서둘렀다. 조선정부는 부담하기로 한 전주 준비와 순변 및 순병의 확보를 인천에서 한성·평양·의주에 이르는 선로객관에 시달하였고, 청국 측에서는 그 해 8월 1일 기술자 150명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이 일행에는 기술자와 학생(견습공)은 물론이고 덴마크인 미륜사(彌綸斯) 등 서양인 기술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정부와 청국은 인천경내의 가설을 끝낸 후 공정을 서둘러 부평과 양주를 거쳐 양화진, 즉 지금의 양화대교 부근 지점을 지나 광화문 쪽으로 전선을 가설했다. 당시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은 시흥(영등포)을 거쳐 서강을 건너는 길과, 양주를 거쳐 양화진을 건너는 두 길이 있었는데 현재 경인고속도로의 코스와 거의 같은 양화진 쪽을 택했다.

 전선의 가설과 운영을 위해 개국한 한성전보총국에서는 ‘한성 인천간의 전선이 개통됨에 따라 본 전보국이 이미 개설되었으므로 개설일자를 9월 28일로 택정한다’고 조선정부에 통고하고 서울·인천간 전신업무를 개시하였는데, 이날을 우정총국(郵政總局)이 개설된 1884년 4월 22일을 기념하는 정보통신의 날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기통신 개시 일로 기념하고 있다.

 인천과 서울간 전선가설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평양과 의주전보분국이 각각 개설되어 업무를 개시하였고, 이와 동시에 미국과 일본, 영국과 독일 등 각국 공사관에 전보신편을 증정하여 전신 이용에 참고토록 하였다.

 가설된 전선은 개통과 동시에 조약의 내용대로 한성전보총국에서 맡게 되었는데, 청의 전보국을 총칭하는 화전국(華電局)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화전국은 전선의 관리를 총괄하는 중국전보총국의 관할 아래 있는 지방국에 불과했지만 인천과 평양, 의주에 분국을 두고 한성에 총국을 둔 것은 전신선을 통해 조선을 좀더 용이하고 지속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이기도 했다.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 가설의 빌미가 된 갑신정변이 끝난 후 일본 정부는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데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물었고, 1885년 초 조선의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원 지불, 일본 공사관 수축비용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漢城條約)을 강요 끝에 체결하였다. 또한 조선에서 청·일 양국 군대의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청국과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게 되었고, 청국이 주도하여 추진하던 전신선 가설에 대해서도 시비를 거는 등, 조선 침탈을 위한 청·

일의 경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어 갔다.

 갑신정변이 끝난 지 10년이 지난 이른 봄날.

 청국 군함 위원호에 실려 김옥균은 돌아오고 있었다. 인천항에서 일본행 정기 우편선에 올라 언제 돌아올지 모를 길을 기약도 없이 떠났던 김옥균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채 관속에 누워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꿈을 펼치고자 했던 고국 땅에는 그의 관 모서리를 두드리며 통곡할 부모형제도 동지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와 누이는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고, 그의 생부는 십년째 옥에 갇혀 있었다. 거사에 관여했던 개화파 동지들은 이미 교수대 위에서 이슬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망명의 세월 10년 동안 김옥균은 일본 위정자들의 학대와 박해 속에서 울분에 찬 날들을 보내야 했다. 필요에 따라 제 잇속을 채우는 일본은 김옥균과 그의 일행을 몹시 껄끄럽고 역겨운 존재로 여기며 배척했다. 더욱이 재기를 도모하고자 했을 때는 일본의 재야 정객들에게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에 협력하지 못하도록 협박하며 압력을 가했고, 김옥균의 동향을 조선정부에 일일이 통보해 주곤 했다.

 결국 김옥균은 수구당에 매수된 홍종우에 의해 상하이로 유인된 후 암살되고, 그 시신은 고국에 도착 한 뒤 관에서 끌어내져 사지를 찢어 능지처참하는 죽임을 또 한번 당하고 만다.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 그가 주도한 갑신정변은 왜 실패한 혁명이 되었나.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되고 있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정변 자체가 민중에 뿌리박지 못한 개화파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이다. 기층질서에 대한 개혁, 왕조질서 그 자체의 변화를 통한 혁명적인 근대를 꿈꾸었지만 그 꿈을 지탱시킬 수 있는 버팀목이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다급하고 무모하게 거사를 시도한 무리수를 둔 것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이는 전신기 도입을 통한 새로운 정보통신 사업을 자주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홍영식의 뜻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무너져 버린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갑신정변과 최초의 전신선 가설에 대한 사실을 들여다보면서 현재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정보통신 혁명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정보통신의 기술과 서비스는 그 자체가 이미 혁명이다. 다행히 우리는 갑신정변 때와는 달리 그 혁명을 주도할 충분한 버팀목을 가지고 있다. 위로는 정부, 옆으로는 통신사업자, 아래로는 이용자들이 그 혁명의 주체들이다. 전화가입자 2150만명, PC 보급 1300만대, 인터넷 이용자 1900만명, 이동전화 가입자 2680만명, 400만 회선이 넘는 초고속정보통신망. 이 수치 자체가 혁명을 주도할 버팀목이며, 성공의 가능성이다.

 특히, 초고속정보통신망은 그 어느 나라에도 우리처럼 밀집되어 보급된 곳이 없다. 그 초고속정보통신망에 어떤 서비스를 상용화시키더라도 그것은 곧 세계기준이 될 것이며, 상용화에 성공한 상품은 마케팅비용 하나 들이지 않고 세계시장에 들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초고속정보통신망은 인터넷 관련 사업을 비롯한 전반적인 정보통신 사업을 주도할 가장 강력한 버팀목이며 무기이다.

 전세계 정보통신사업의 제패를 위한 혁명의 추진 과정에서 김옥균과 그 일행들이 아쉬워했을지도 모르는 혁명의 모든 요소를 우리는 갖추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상용화된 기술은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상품이 되고 만다. 새로운 최고의 상품을 통한 세계 제패를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는 무모함도 필요하다.

 무모함이 갖는 파괴력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실패한 혁명까지 기억하는 것이 역사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 생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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