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업계는 지난 99년을 국내 게임산업의 르네상스로 기억하고 있다. 불과 몇년 전이지만 당시 아케이드·PC 패키지·온라인 게임 등 모든 부문에서 활력이 넘쳤으며 시장규모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98년 6256억원에 그쳤던 국내 게임시장은 99년 사상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 1조239억원을 기록했다.
당시 시장 상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게임시장이 폭발적으로 팽창한 데 대해 블리자드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와 PC방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PC방이 전국의 골목에까지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깔아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스타크래프트의 배틀넷이 신드롬처럼 인기를 얻음으로써 게임산업이 꽃을 피웠다는 설명이다. 외국의 유력 잡지와 신문들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았다.
지난해 2월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PC방 한국 인터넷 발전의 핵심’이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PC방이 컴퓨터 게임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한국 인터넷산업 발전에 중추적인 역활을 담당했다는 내용이었다. 1만5000여 PC방이 성업중이고 시장규모는 4조20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그로부터 1년 2개월여가 지난 2001년 4월 현재 PC방은 더 이상 미디어의 초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신문·잡지는 물론 업계에서조차 PC방을 인터넷과 게임산업의 꽃으로 추켜 세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청소년 유해시설로 간주돼 학교 근처 300m 이내의 정화구역 밖으로 밀려날 처지에 몰렸다. 더욱이 최근에는 온라인 게임 개발사와 게임 콘텐츠의 유료화를 둘러싸고 마찰을 빚고 있지만 정부나 업계 어느쪽에서도 PC방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 불과 2년여 만에 PC방은 토사구팽의 처지에 몰린 셈이다.
PC방업계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무엇보다도 사업을 계속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채산성이 악화돼 있다. 한때 개인 창업 아이템 1 순위로 꼽혔던 PC방이 이제는 대표적인 산업으로 꼽히지 않을 정도다. 기존 업
소들이 사업 정리를 위해 물건을 내놓아도 사려는 사람이 없다.
박원서 전멀티문화협회장은 “요즘 PC방을 둘러 보면 오후 6시에서 10시까지 황금시간대조차 손님이 없으며 시간당 1000원에도 못미치는 요금으로 인건비도 건지기 힘든 상황”이라며 “딱히 통계가 있는건 아니지만 현재 운영중인 업소의 80%가 매물로 나와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PC방이 생존권까지 위협받을 정도로 위기에 직면한 가장 큰 이유는 영업장 포화에 따른 과당 경쟁 때문이다. 97년부터 생겨난 PC방은 98년초 약 200개였다가 98년말 2500개로 늘어났다. 99년에는 1만5150개로 증가했으며 2000년에도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 2만1460개에 이르기도 했다. 결국 2년 사이에 PC방은 10배 증가한 셈이다. 그동안 게임시장의 성장 폭을 최소 5배 이상 상회하는 비율이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당연한 듯 과당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초기에 시간당 2000원이던 PC방 이용요금이 99년 여름 1500원대로 떨어졌으며, 2000년에는 다시 1000원대로 급락했다.
과잉공급→고객감소→요금하락으로 이어지는 빈곤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최근 들어서는 일반가정에까지 ADSL을 비롯한 고속 인
터넷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어 PC방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전국에 걸쳐 최소한 2조5000억원이 투자된 PC방이라는 인프라가 사양화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악의 경우 온라인게임은 물론 PC게임의 인프라인 PC방이 일순간 붕괴될 수도 있다는 우려섞인 진단을 내놓고 있다.
한빛소프트 김영만 사장은 “PC방이 어렵고 옛날과 같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온라인게임업계 매출의 90% 이상이 PC방에서 발생하고 PC 패키지게임 역시 배틀넷 서비스까지 포함하면 PC방의 의존도가 80% 이상은 될 것”이라며 “PC방이 고사하면 국내 게임산업의 뿌리가 썩어 없어지는 것과 다를바 없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무엇보다도 PC방업계 스스로 다양한 비즈니스모델을 접목함으로써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일부 지역에서 시간당 500원까지 내려간 요금을 현실화하는 등 과당경쟁을 자제하고 게임 위주의 콘텐츠를 교육, 전자책, 디지털 영화 등으로 다양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PC게임방이 아니라 복합 첨단 디지털 문화공간으로 변신하는 것만이 현재의 위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
최근들어 초고속 인터넷망이 보급되면서 이에 적합한 광대역(브로드밴드) 디지털 콘텐츠가 핵심으로 떠오르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현재의 협대역으로는 서비스가 불가능한 브로드밴드 콘텐츠 배급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영화, 비디오, 애니메이션, 방송 동영상 등 Mbps 급 광대역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 가정에 빼앗긴 고객의 발길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임에 분명하다.
PC방업계의 이같은 자율적인 노력과 함께 게임업계도 PC방과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PC방의 채산성이 극도로 악화돼 고사 직전에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고 특히 온라인게임 선발업체들은 PC방의 구매력과 채산성을 감안한 파격적인 과금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또한 후발업체들의 경우 PC방업계에 일방적으로 경제적 부담을 강요하는 유료화를 단행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아울러 문화부·정통부 등을 포함한 정부부처에서도 PC방을 단순히 청소년의 유흥시설로 보지 말고 게임을 비롯한 인터넷 콘텐츠의 배급 인프라로 간주하고 규제보다는 육성하는 쪽으로 인식과 정책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이제까지 PC방이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를 제공한 게임방이었다면 앞으로는 광대역 인터넷 콘텐츠를 풍족하게 향유할 수 있는 디지털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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