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기존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피 지배계층이 그 권력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탈취하는 권력교체의 형식을 일컫는 혁명은, 일반적으로 그 주체세력의 성격에 따라 위와 아래, 그리고 옆으로부터의 혁명으로 나뉘어 진다.
이러한 혁명은 성공했을 때 혁명(革命)이라는 이름이 붙여지지만 실패했을 경우에는 정변, 반란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1884년,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을 꿈꾸던 이들이 있었다.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으로 정보통신 역사전개 과정에도 영향을 끼친 그 사건을 우리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 부르고 있다.
1884년 12월 4일 밤. 우정국(郵政局)에서 성대한 연회가 시작되었다. 신축된 우정국 청사 낙성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우정국 총판 홍영식을 비롯하여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등 보수파 핵심 인물과 김옥균을 주축으로 하는 혁신 개화파, 그리고 미국공사 후트, 영국 영사 아스턴 등 각국 공사들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속속 참석했다.
같은 시각, 우정국과 그리 멀지 않은 별궁 뒤 서광범의 집에서는 혁신 개화파 요원들이 잠복하여 연회장의 진행사항을 숨죽인 채 살피고 있었다. 바싹 마른 대팻밥이 담긴 포대와 석유병, 폭약 등을 준비하고 별궁에 불을 지르기 위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예정보다 조금 늦은 시간, 연회의 주인공인 홍영식이 일어나 말문을 열었다. 왠지 불안해 보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빈들, 특히 외국 사절들이 참석하여 준 데 대해 우정국 총판으로서 감사드리고 우정국이 개설됨으로써 장안 사람들은 물론 외국 사절들의 통신 거래에 다소나마 편의를 도모해 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내용이었다.
뒤이어 미국 공사 후트를 비롯한 각 공사들의 축사가 끝나고 음악 연주가 이어지면서 연회는 무르익어 갔지만, 그 분위기와는 달리 홍영식 못지 않게 초조한 기색으로 바깥출입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었다. 김옥균이었다.
한편, 불을 질러 연회장을 혼란에 빠뜨리기로 한 행동대원들은 대팻밥을 담은 포대에 석유를 붓고 별궁 마루에 불을 붙였으나 쉽사리 불이 붙지 않아 서두르다가 불도 붙이기 전에 화약을 폭발시키는 사고를 저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순포들이 달려오고, 행동대원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계획에 차질이 생겨 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불붙이기 쉬운 이웃집 아무 곳에라도 불을 지를 것을 명령하면서 연회 시간을 될 수 있는 대로 길게 끌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우정국 북창 밖에서 ‘불이야’하는 소리가 들리며 불빛이 솟구쳤고, 그 불꽃과 함께 연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순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던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이 비명과 함께 칼을 맞고 거꾸러질 듯 쓰러졌다. 혼란은 극에 이르렀고 김옥균은 곧바로 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겨 일본군 100여명과 50여명의 조선군인으로 호위케 함으로써 계획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날 개화파는 청과 밀접하게 연계돼있던 민씨 일파가 제거된, 개화파가 개혁추진을 위한 중요한 자리를 장악한 새로운 내각을 발표하고 각국 공사관에도 정변의 뜻을 전달, 지지를 요청하면서 청에 대한 조공 폐지, 인민 평등의 권리에 따른 인재 등용, 전국의 지조법 개혁 등 14개조에 달하는 조선의 개혁을 위한 혁신정책을 반포하고 혁명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시작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다시 거처를 옮긴 후 청의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원세개는 청불전쟁이 격화된 가운데에서도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공격했고,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개화파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결국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주축세력 가운데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에 사살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갑신정변 실패는 국제환경 등의 외적 조건과 대외정세 판단의 오류, 조선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미숙함, 개화사상이 위로부터의 개혁사상이었던 관계로 제대로 일반민중에 침투하지 못했다는 것과 정치, 경제, 군사적 역량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말만을 믿고 시도한 무모성 때문이었다. 또한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파 인물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궁을 피로 물들게 함으로써 개화파에 우호적이었던 왕과 일반 국민들로부터 개화사상과 운동에 대한 지지를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우리나라에 최초의 전신선이 설치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당시 통신사업을 주관하던 우정국에서 정변이 발생했다는 것과, 이미 조선정부 나름대로 전신선을 자체적으로 설치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중에 발생한 사건으로 정보통신 역사의 전개과정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청에서는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모든 사건을 변리 하도록 하여 오대비(吳大砒) 등을 조선에 파견, 정변의 내역을 조사 처리하게 하고 정여창에게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동을 명령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 가설은 이때 들어온 오대비의 제안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 이후 조선 내에서 갑신정변과 같은 변란이 일어날 경우 신속히 청에서 알고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전선가설을 제안했다. ‘전선을 가설하되 여순에서 시작하여 봉황성문 밖의 경계를 통과하여 변계를 거쳐 조선의 수도까지 연결한다. 전장은 1000여리다. 전선 가설비는 조선정부에서 부담한다. 목재를 벌채하여 사용하면 5분의 1은 절감할 수 있으므로 그 밖의 소요품은 5만여금에 불과하다. 조선정부도 용기를 내어 이에 따를 것이다.’
조선정부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 청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터이고, 이후에 발생할 지 모를 또 다른 정변에 대한 대책으로 국왕의 이름으로 이홍장에게 전신선 가설에 필요한 자금의 차관을 요청했다. 이에 이홍장도 통신선 가설 제안에 찬성하여 여창우, 진윤이 등을 조선으로 파견하여 외무독판 김윤식, 협판 서상우 등과 협의를 마친 다음 1885년 6월 6일(음력) 전선가설에 대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이 가설되게 된 기본조약으로, 조선정부는 청에 5년 거치 20년 상환 조건으로 10만냥의 설비자금과 기술을 차관 받고, 차관이 상환될 때까지 청의 화전국(華電局)이 전국(電局)의 운영과 관리를 맡고, 조선정부는 화전국의 지시에 따라 전선가설에 필요한 소요전주와 인력을 제공, 전신선로의 보호 임무를 맡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청이 주도하는 최초의 전신선 가설공사 이전에 우리의 자주적인 전신선 가설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정보통신의 혁명이라 할 만한 시도였다.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정변을 일으킬 장소를 마련했고 일본군이 철수한 가운데 국왕을 끝까지 모시다 현장에서 죽음을 당한 우정국 총판 홍영식, 그는 정치적 혁명뿐만이 아니라 정보통신에 대한 혁명도 기도하고 있었다.
보빙사절단(報聘使節團)의 일원으로 미국에 갔던 홍영식은 미국의 전신시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국내에 들어와서 전신기 8좌(座)를 미국에 주문했다. 청과 일본이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전신 시설임을 알고있었고, 전신의 가설이 부강의 기본이요, 개화의 근원임을 인식하고 있던 홍영식은 서둘러 전신기를 주문했던 것이다. 근대적 통신시설을 우리 힘으로 갖추고자 하는 시도였다. 홍영식이 주축이 되어 주문한 전신기 8좌는 이후 청이 주도하여 가설한 서로전선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추정되는 물량이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외무독판 김윤식은 미국에 공문 하나를 보냈다. ‘홍영식은 정변에 의해서 죽었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도주하였으므로 과거에 그들의 손을 거친 일은 우리정부가 책임질 수 없으니 전신기 8좌도 역시 구매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공문이었다.
혁명의 실패와 함께 자주적인 정보통신 혁명에 대한 꿈도 함께 사라져 간 것이다.
최초의 전신선 가설의 구체적인 내용과 위로는 정부, 옆으로는 통신사업자, 아래로는 이용자 등 모두가 혁명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한 우리나라 정보통신 혁명에 관한 내용은 다음 호에 거론한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 생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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