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적자원관리(ERP)말입니까. 아직 도입하지 않았어요. 올해도 아마 계획만 세워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해 모 기관이 실시한 중소기업의 정보화 실태 조사에서 우수업체로 평가받은 위성안테나업체인 A사 관계자의 말이다.
한국 제조업의 뼈대를 이루는 중소기업의 정보화가 답보상태다.
300만개에 달하는 중소기업 가운데 ERP를 비롯한 정보시스템의 구축으로 실익을 얻을 수 있는 기업은 8000개 정도다. 종업원 100명은 넘어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의 ERP 도입률은 5% 정도에 불과하다. 구매비용 절감과 판로확대의 주요 수단인 전자상거래를 실시하는 기업은 3.4%에 그친다.
중소기업으로 가면 정보화는 더욱 엉망이다. 가장 초보적인 수준인 회계관리소프트웨어와 사무자동화소프트웨어 이용률도 각각 23.5%와 20.3%에 불과하다.
초고속통신망 사용업체(24.9%)보다 아직 전화접속방식으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업체(42.4%)가 훨씬 많은 상황이다. 또 많은 업체가 홈페이지를 구축해 운영하고는 있지만 회사 홍보용일 뿐, 기업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솔루션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 중에는 정보화가 앞선다는 중소전자업체들이 밀집한 반월공단도 PC보급률은 1인당 1대에 크게 못미친다.
중소기업들의 정보화가 더딘 이유는 무엇일까. 중소기업 경영인들의 말을 빌리면 『관심은 있지만 돈도 없고 방법도 몰라서』다.
먼저 비용문제가 크다. 간단한 ERP시스템의 도입에는 매출 100억원 기준으로 업체당 7000만원에서 1억2000만원 정도가 들며 시스템 도입에서 운용까지는 8개월 정도 시간이 걸린다. ERP를 도입해 경영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전자상거래를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는 싶지만 중소기업에 ERP는 들여놓기 벅찬 「물건」이다.
정작 정보시스템을 도입해도 문제다. 이를 활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둬야 하는데 중소기업으로선 여기에 들어가는 돈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또 전문인력도 보수가 적은 중소기업으로의 취업을 꺼린다.
중소기업청 등이 지난해 조사한 결과 정보화 비용 과다(34%)와 전문인력 부족(33%)이 정보화 추진의 가장 큰 애로사항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보화를 통해 과연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경영자들도 여전히 많다.
중소기업청이 지난해 ERP를 도입한 9개 회사를 조사한 결과 이들 업체에서 평균 5명의 인원감축효과가 있었으며 생산 및 납품기일도 일주일 정도 단축되는 등 생산성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것이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B사의 사장은 『ERP 관련 서적을 찾아보면 엄청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 주변에서 ERP를 도입하고 눈에 띄게 생산성이 좋아졌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은 정보화에 정부가 좀더 적극 나서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우선 정보화가 가져다 주는 이점을 강력하게 홍보, 모든 중소기업인들이 공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홍보를 통해 중소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정보화에 나서게 되면 공동구매 등의 방법을 통해 ERP 구축비용도 현재보다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중소기업 경영인들은 정부지원도 컴퓨터와 솔루션 몇개를 지급하는 식의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솔루션 등의 지속적인 보급, 인재교육, IT컨설팅 등 관련분야까지 계속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또 정보화를 선도하는 업체에는 정부보조금 지원, 저리자금 융자, 세제혜택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정보시스템의 도입에 저항하는 경영자나 관리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다.
정보시스템의 도입으로 거래내역이 투명해지면 앞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내야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또 과거의 탈세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업체도 있다.
어느 업체는 정보시스템을 도입한 후 물품을 빼돌렸거나 장부를 조작한 게 들통나 옷을 벗은 물류 및 재무 담당 임원도 있다.
결국 정보시스템이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그릇된 관행이 문제인 것이다.
한 ERP구축업체 관계자는 『중소기업의 정보화가 진행되면 무자료거래나 장부조작 등의 문제는 줄어들 것』이라며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처벌하는 것 이전에 이를 시정하는 쪽으로 중소기업의 정보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정디바이스업체인 B사의 사장은 『조금 무리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지난해 ERP시스템을 도입했다』라면서 『당장 큰 효과를 본 것은 아니지만 창고에 있는 줄도 모르고 똑같은 물품을 다시 사는 일이 없어져 좋다』고 말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중소기업의 정보화정책도 이처럼 건전한 의식을 가진 대다수 경영자들이 큰 부담없이 정보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미 우리는 정보사회에 접어들었다. 정보수준이 기업경쟁력의 척도가 됐다. 대기업과 달리 정보시스템에 대한 투자여력과 운영노하우가 없는 중소기업은 경쟁력이 더욱 약화될 수 있다.
국내산업의 뼈대라는 중소기업은 갈수록 「칼슘 부족」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의 자발적 노력과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이 어우러질 때 중소기업의 정보화는 탄력을 얻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A사 전산담당자의 말은 앞으로 중소기업정책의 방향이 어때야 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중소기업의 정보화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여서 아직 성공하지도 실패하지도 않았습니다. 투자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게 아니라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이 절실한 때입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 김규태기자 star@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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