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17회-세 도시 이야기

도시는 생명체다. 온갖 사람과 집단들이 모여 만들어진 도시는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그래서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도시」라고 말했나 보다.

여기 동북아시아의 위대한 발명품들이 있다. 베이징, 도쿄 그리고 서울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세 나라의 수도들이다. 셋중 역사가 짧은 도시는 도쿄다. 에도(강호)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수도로서의 역할은 고작 120여년에 불과하다. 이름 자체가 수도인 서울은 조선의 600년 역사와 호흡을 같이 했다. 베이징원인(袁人)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의 곳 베이징은 10세기 연나라 이후 숱한 중국 왕조와 부침을 같이 했던 도시다.

세 도시는 오랜 침묵속에 있던 세 나라가 지난 한 세기 동안 겪은 현대화를 상징한다.

이제는 현대화를 넘어 세 나라 정보기술(IT) 중심지로 떠올랐다. 특히 베이징의 중관춘, 도쿄의 시부야, 서울의 테헤란로 일대는 그 핵이다.

세 나라의 동북아 IT 주도권 다툼 역시 이 세 곳에서 판가름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베이징 중관춘

1년전 이맘때였다. 중관춘 4거리의 맥도널드 빌딩에 200여명의 청장년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 마르크스주의연구회 주최의 학술토론회였다.

조용하게 진행되던 이날 토론회는 한 주제발표자가 졸부집단을 맹 비난하면서 시끌벅적해졌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배금주의, 향락주의, 상업주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그런데 토론 열기가 고조될수록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늘어 났다. 파장 무렵에는 고작 30여명만 남았다. 자리를 떠난 사람들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분석에 발길을 돌린 것이다.

이렇게 변했다. 베이징은 더 이상 홍위병들이 휘젓고 다니던 곳이 아니다. 천안문 사태도 먼 옛날이 됐다. 첨단 빌딩이 밀집한 자본주의 도시로 바뀌었다. IT업체가 밀집한 베이징 서북쪽 중관춘이 그랬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토론회를 가진 곳이 미 제국주의의 상징인 맥도널드라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중관춘에는 7000여개의 IT업체가 있다. 롄상, 쓰퉁, 베이다팡정과 같은 대기업은 물론 신랑, 소후, 장먼왕과 같은 신흥 기업들이 몰려 있다. IBM, GE, 인텔, 미쓰비시 등 다국적 기업들도 있어 이곳이 과연 사회주의 국가의 수도인지 헷갈릴 정도다.

화려한 중관춘 거리의 뒤편에는 불법 복제상들이 복잡하게 늘어서 있다.

그러나 중관춘의 힘은 북쪽의 과학촌에서 나온다. 이곳에는 베이징, 칭화, 인민, 베이징외국어대 등 중국의 4대 대학을 비롯해 60여개의 크고 작은 대학들이 있다. 또 과학기술원 산하 200여개 연구소도 있다.

오늘과 같은 중관춘의 발전은 바로 해외 유학파들의 공로였다. 천안문 사태 이후 해외로 나갔던 공대생들이 상황이 호전되자 귀국해 벤처 붐을 일으켰다. 해외파들의 수는 대략 1000여명.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중국인의 10%에 해당한다.

이제는 중관춘내 대학생과 연구원들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일을 하기 때문이다. 성공하지 못하면 베이징 시민권을 얻지 못해 낙향해야 한다. 중국은 아직도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회주의 국가다.

중국 정부는 중관춘을 IT대국을 향한 관문으로 육성하려 한다.

앞으로 10년 동안 26조원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중국 정부는 중관춘 외곽에 상디(上地)정보산업단지를 조성해 뒷심을 기를 방침이다.

80년대에는 광둥성의 선전이, 90년대에는 상하이 푸동이었다면 21세기는 바로 베이징의 중관춘이다.

◆도쿄 시부야

도쿄 23개구 가운데 하나인 시부야는 쓰다는 뜻의 「시부」와 계곡의 「야」를 합쳐 처음엔 「비터밸리(bitter valley)」로 불리웠으나 인터넷 기업들이 대거 둥지를 틀면서 「비트(bit valley)」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시부야는 원래 백화점과 음식점거리였다. 지금도 미쓰코시, 세이코 등이 있어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쇼핑과 소비의 거리다. 압구정동과 신촌을 합쳐놓은 꼴이다.

이러한 곳을 IT밸리로 부르기 힘들다. 하지만 일본 인터넷 기업의 25%가 이곳에 밀집했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이곳 역시 미국에 유학했거나 미국 기업에 근무한 해외파들이 주도한다. 대표적인 기업인 네트에이지의 창업자 니시카와 기요시와 마쯔야마 타이가는 각각 아메리카온라인(AOL)재팬과 앤더슨컨설팅 출신이다. 최대 인터넷 쇼핑몰회사인 낙천시장(樂天市場)의 사장 미키타니 히로시는 하버드대 출신이며 인터넷 경매업체인 DeNA의 여장부 난바 토모코도 매킨지컨설팅 출신이다.

「놀기 좋은 곳」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에서 보듯 이들은 그저 사업을 재미삼아 한다.

영화 「철도원」의 주인공처럼 묵묵히 일하는 전형적인 일본 비즈니스맨은 이미 사라졌다.

일본에서도 「충(忠)」의 사무라이시대가 지고 있다. 글로벌 경쟁의 격화로 일본 기업들이 더 이상 종신고용을 보장하지 못하면서 「회사인간」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를 너무나 잘 아는 일본 젊은이들은 창의성을 무기로 삼기 시작했다. 해외 물을 먹은 젊은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이곳 젊은이들은 시부야역 앞 주인을 기다리다가 죽은 충견 하치의 동상을 애완견처럼 보며 스쳐지나갈 뿐이다.

시부야는 이러한 일본 변화의 심장부다.

◆테헤란로

유교적 질서로 평온하기만 했던 서울은 고작 100년 만에 격심한 변화를 겪는다. 일제의 대륙 진출의 전초기지에서 분산도시로 또 산업화의 상징으로 급변했다.

이제는 동북아지역의 중심지로 거듭나려 하며 그 맨 앞에 바로 테헤란로가 서 있다.

원래 뽕밭이었던 이곳은 건설가와 증권가를 거쳐 이제는 IT밸리로 거듭나고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IT기업들이 테헤란로에 몰린 것은 그만큼 자본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벼락돈을 만진 졸부들이 IT기업에 대한 투자로 돈을 버는 방법을 알게 된 이후 이곳은 세계 유례없이 급성장한 벤처기업 밀집지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증시가 위축되자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거리는 다시 썰렁해졌다. 언제 다시 회복될지 모른다.

지난 몇 년 사이 테헤란로가 만들어낸 것은 무수한 부실 벤처와 강건너 북쪽과의 빈부 격차 심화뿐이라는 조롱도 무성하다.

그렇지만 테헤란로는 실제 거리와 무관하게 IT벤처 신화의 상징물로 많은 차들이 빼곡이 차 있다.

◆단상

시부야의 젊은 사업가들이 나름대로 야심을 펼쳐가나 여전히 대기업들의 기세를 꺾지 못한다. 이는 이곳의 대표적인 기업인 히카리통신이 최근 경영난을 겪는 것에서 감지된다.

어둡고 음울했던 에도시대에 재능을 망쳐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에도의 후신인 도쿄에서도 그랬다. 재능으로 뭉친 젊은 사업가가 밀집한 시부야가 이러한 전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일단은 비관적인 견해가 우세하다. 소비 지역일 뿐 대학도 없고 일본이 자랑하는 제조업체도 인근에 없다.

일본인들은 오히려 시부야보다는 천년 고도 교토에 생겨나는 첨단벤처산업단지에 주목한다. 교토, 리쯔메이칸, 도시샤, 로코쿠 등 종합대학과 단과대 40여개가 있고 교세라, 닌텐도 같은 벤처로 성공한 기업들이 있는 바로 그곳이다.

테헤란로 역시 마찬가지다. 벤처산업이 발달하자 술집만 다시 늘어났을 뿐이다. 변변한 대학도 없어 산학연계가 전무하며 그동안 힘이 됐던 자본도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이곳에 있는 인터넷 벤처기업들도 시장 자체의 규모보다는 시장을 창출하는 데 비용을 더 많이 쓴다. 그 결과 인터넷 벤처기업들이 하나둘씩 이곳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국인들은 이 때문에 대덕밸리로 눈을 돌린다. 대학과 벤처기업,정부가 한데 어울려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총알인 자본이 없고 인재들

은 여전히 서울만 고집하는 게 문제다.

이에 비해 중관춘은 거의 모든 것을 갖췄다. 연구개발인력도 풍부하고 이를 구현할 산업단지도 있다. 여기에 살아남겠다는 의지까지 있다.

중관춘의 흠은 대덕밸리와 마찬가지로 자본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곧 해소될 전망이다. 막강한 화교자본이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있고 다국적 자본 역시 최대 승부처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유치는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 본격화할 것이다.

중관춘의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나온다.

만연한 정부 부패와 인터넷산업의 육성과 정보 유통을 억제하려는 중국 정부의 모순적인 정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들은 중관춘이 시부야나 테헤란로보다 훨씬 크게 또 막강한 벤처단지가 되는 데 전혀 걸림돌로 작용할 것 같지 않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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