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e코리아]Company@Korea-경영자를 업그레이드하라

지난해 8월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을 때다. 김재수 현대 구조본부장은 박종섭 현대전자 사장에게 『건설의 기업어음(CP) 1000억원 어치를 매입해달라』고 부탁했다가 무안해졌다.

박종섭 사장은 『도와줄 형편이 아니다』며 정중히 거절한 것이다.

김재수 본부장의 요청은 사실 정몽헌 회장의 뜻이다. 거절은 곧 총수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느 그룹보다도 상하관계가 엄격한 현대에서 이처럼 「불충」스러운 행동이 나오자 재계는 깜짝 놀랐다. 그룹 경영진 사이에선 박종섭 사장에 대한 반감이 고조됐다.

반면 투자자들은 박종섭 사장에게 「용기있는 행동」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박종섭 사장은 별다른 감흥이 없다. 『주식회사에서 대다수 주주의 뜻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 단지 기본에 충실했을 뿐인데 비난도, 칭찬도 받을 이유가 없다.』

일부 대기업을 시작으로 국내 대기업들이 바뀌고 있다. 무조건 총수의 눈치만 살피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총수의 자리를 주주들이 차지하고 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셈이다.

단적인 게 임원인사다. 대기업들은 해마다 경영진을 개편한다.

지금까지의 인사행태는 일단 선임부터 해놓고 주총에서 형식적이나마 추인받는 것이었다.

2000년부터 달라졌다. 많은 대기업들이 연말께로 정해진 고위 임원인사를 연초로 늦췄다. 실적은 물론 주가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해 주주들의 의견을 모아 인사하겠다는 것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평소에 잘 만나기 힘들었던 기업의 주요 경영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러해 의아스러웠다.

이들이 만남을 자청한 것은 좋은 실적을 홍보해 자신을 더욱 알리거나 나쁜 실적이라면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 위해서다.

예년 같으면 그 시간에 그룹이나 자사의 실세를 찾아다닐 때다.

아직 구태를 벗지 못했으나 「상사집 드나들기」는 예년에 비해 대폭 줄어들었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달라진 점은 또 있다. 경영계획의 수립 과정이다.

대기업들은 매년 초에 당해연도 매출계획을 짜는데 올라오는 계획을 보면 터무니없이 낮게 잡기 일쑤다. 그러다가 매출이 오르면 그게 고스란히 해당 임원이 사업을 잘해 나온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연초에 10% 성장을 밝혔다가 연말께 100% 성장한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외국 회사라면 당연히 「해고」감이다. 시장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인물에게 어떻게 사업을 맡길 수 있느냐는 논리다.

IBM과 같은 기업은 계획과 실적의 오차율이 ±5%라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 기업들은 너무나 오랜 관행에 찌들어 여전히 매출계획을 낮게 잡는다.

그런데 최근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달성 가능한 목표치를 담은 사업계획을 보고하는 임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박영구 삼성코닝 사장은 『그동안 사업 보고를 많이 받아봤지만 이번처럼 명확한 근거를 둔 실제 목표치를 처음부터 제시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무엇이 경영자와 임원들을 달라지게 했을까. 바로 주가와 디지털기업문화다.

아무리 실적이 우수해도 주가가 낮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주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그동안 우리 기업들은 이를 도외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증시 밖에서도 자금을 얻을 곳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IMF 이후 자기자본비율이다, 구조조정이다 하면서 자금줄이 얼어붙었다. 금융기관들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벌이는 판에 예전처럼 오랫동안 거래해왔다고 부실한 기업에 무작정 돈을 꿔줄 수 없게 됐다.

또 기업 경영자들은 치밀한 기획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사업을 전개할 수 없게 됐다. 워낙 경영환경이 급변하고 변수도 많아지자 시장을 제대로 읽는 게 경영자의 필수 덕목이 됐다. 잘못 투자했다가는 회사 전체가 어려워지는 일도 많아졌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각종 경영지표는 물론 시장 상황을 수시로 파악해야만 위험성을 낮출 수 있게 됐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경영자정보시스템·전사적자원관리(ERP)·지식경영시스템 등의 첨단 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다른 기업들이 디지털 무기를 갖추고 있는데 혼자서 재래식 무기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 기업들이 많이 변했는가. 전문가들의 견해는 회의적이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본다.

노부호 서강대 교수는 『IMF 이후 지난 3년동안 경영자의 인식과 기업행태가 많이 나아졌으나 글로벌 경쟁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미흡하다. 지식경영이다 뭐다 「디지털 옷」을 잔뜩 끼어입었으나 많은 경영자들이 아직도 권위적인 아날로그적 사고를 갖고 있으며 더 큰 문제는 이를 위기로 여기지 않는 것』라고 꼬집었다.

선진 기업에 걸맞게 업무 프로세서도 혁신하고 창의성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는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기업 경영자들은 영원하겠거니 믿었던 대기업들이 고꾸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변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각인하게 됐다.

이제는 대안을 찾아나설 때다. 전문가들은 기업 변화의 최우선 과제면서 가장 큰 해결책은 바로 경영자의 의식 전환이라고 말한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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