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9회- 마늘전쟁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 지난 6월 7일. 한국 외교통상부는 중국 대사관으로부터 한장의 긴급 전통을 받았다. 그날 중국 경제무역부 대변인의 발표를 담은 문서였다. 발표 내용은 이랬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갈수록 수입이 증가해 대외무역법 제7조 규정에 의해 중국 경제 발전에 큰 장애가 되는 한국산 폴리에틸렌과 이동전화의 수입을 7일부터 일시 중단한다.」

한국 외교통상부는 발칵 뒤집혔다. 지난 92년 수교 이후 중국과 처음 통상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외교통상부는 부랴부랴 중국의 진의 파악에 나섰다.

실마리는 대변인이 덧붙인 말에 있었다. 대변인은 『한국정부는 중·한 무역관계의 거대한 관점으로 중국의 입장과 태도를 잘 고려해주기를 바란다. 아울러 기존의 수출방식을 탈피해 양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방법도 찾았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외교통상부는 일단 중국정부가 뭔가 협상을 원한다고 분석했다. 수입중단 앞에 「일시」라는 수식어를 단 것에서 더욱 분명했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굳이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일주일 전 수입 마늘에 대해 315%의 긴급관세를 매기는 조치를 발표한 한국정부측을 겨냥한 조치다. 중국정부는 자국산 마늘 수입에 대한 한국정부의 규제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 마늘 수입에 대한 한·중협상은 4월 말 이후 두차례 열렸으나 결렬됐다. 한국정부의 입장은 명확했다. 한국의 마늘 생산 농가는 42만여 가구. 전 농민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생산액도 1조원을 넘는다. 마늘은 쌀에 이어 두번째로 중요한 농산물이다.

밀려드는 중국산 마늘로 한국농민들은 시름시름 앓으면서 이를 방치하는 정부에 크게 격분하고 있었다.

총선을 앞둔 현 정권으로선 크게 부담스러웠다. 민주당은 총선을 앞둔 4월 초에 중국산 마늘에 대해 긴급관세를 매긴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한국농민의 환호와는 달리 중국정부는 발끈했다. 한국정부가 중국산 마늘에 대해 10배나 높은 관세를 매긴다는 것은 벌써 지난해 말이었다. 그런데 이를 새삼 끄집어낸 정치성 짙은 발표가 중국정부로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사는 나라가 기껏 마늘 하나를 놓고 수입을 규제해? 부자 인심이 박하다더니 진짜로구먼.』

중국 지도층의 속마음은 이랬다. 한국에 마늘농가가 있다면 중국도 있다. 중국 마늘 농가는 산둥성, 장쑤성, 안후이성, 허베이성에 집중됐다.

한국에는 주로 산둥성 마늘을 수출해 왔다.

그렇다고 중국정부가 고작 한 성의 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이처럼 초강수를 둬야만 했을까. 한국정부의 통상외교가 어설프기는 했으나 유럽연합(EU) 등이 중국산 농산물에 대해 규제한 것에 비교하면 규제의 강도는 약했다.

중국의 피해액도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현지 언론사인 공상스보(工商時報)의 「이번 마늘분쟁으로 산둥성이 입은 피해는 없으며 다만 독일, 브라질 등으로 연쇄반응이 일어날까 걱정」이라는 보도처럼 한국조치에 대해 강경대응을 하지 않을 경우 다른 국가가 뒤따를 것으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번 한국의 긴급관세로 입을 피해액은 많아야 1500만달러 상당이다. 그런데 한국산 제품의 수입규제 규모는 무려 5억달러에 이른다.

한국의 외교통상부는 당황했다. 중국정부의 보복조치가 나오리라고 예상했으나 이처럼 강력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얻을 건 없고 잃을 것 뿐」인 협상은 처음부터 중국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아직 가입하지 않은 중국을 상대로 정상적인 협상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한국정부는 한달 뒤 애초 방침을 철회하고 중국의 요구대로 규제를 완화키로 합의했다.

마늘 농가의 반발도 거셌으나 국내 폴리에틸렌, 휴대폰 업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폴리에틸렌 업체들은 심각했다. 중국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휴대폰 업계의 피해는 미미했다.

수출이 중단되면서 국내 업체가 입은 피해는 고작 400만달러 안팎에 불과했다. 피해 업체도 삼성전자에 국한됐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폴리에틸렌보다도 휴대폰의 수출 피해가 더욱 부각됐다.

그만큼 휴대폰 수출은 국내에서 큰 관심거리다. 반도체, LCD에 이어 3대 수출품목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중국은 휴대폰을 비롯한 정보통신기기의 차세대 시장이었다. 한국 업체들은 중국시장을 차세대 시장으로 집중 육성하고 있다. 이를 중국정부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보복조치에 휴대폰을 끼워 넣은 것이다.

또 알려진 것보다도 중국에 수출하는 국산 휴대폰의 물량은 많다. 간접 수출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물량이 있다. 더욱이 국산 휴대폰은 중국에서 큰 인기다.

중국정부의 발표를 듣자마자 삼성전자 관계자들이 득달같이 전자산업진흥회를 방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진흥회는 정부 요로에 업계의 입장을 강력히 전달했고 이는 외교통상부에도 전해졌다.

외교통상부가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중국과의 협상을 서두른 것도 이처럼 국내 산업에 미칠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끌려 다닌 저자세 외교는 도마위에 올랐다. 정부를 성토한 것은 마늘농가뿐이 아니었다. 늘 저자세인 우리 외교는 대국인 미국과 당당히 겨루는 북한의 외교와 크게 대조됐다. 저자세 외교에서도 얻은 게 있었다. 휴대폰으로 상징되는 국산 정보통신기기의 대중국 수출전선에 끼었던 먹구름이 사라졌다. 그 효과는 3개월 뒤에 나타났다.

아셈회의에 참석차 방한한 주룽지 중국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한국과 CDMA에 긴밀히 협력키로 합의했다. 차이나유니컴의 CDMA 장비입찰에 한국 업체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 통신시장에서 한국의 입지는 커진 셈이다. 그렇다고 중국정부가 무작정 한국 업체의 통신시장 진입을 용인할 것으로 여기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중국은 다만 집중 육성하려는 자국의 통신산업 발전에 한국의 힘을 빌리려는 것일 뿐이다.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지 버릴 카드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이번 휴대폰 금수조치에서 중국정부의 생각은 그대로 나타나 있다.

중국은 통신산업 육성 차원에서 휴대폰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콩카, 하이얼, TCL, 커지엔, 보다오 등 자국내 휴대폰 단말기업체들에 대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우촨지 신식사업부 장관은 얼마전 베이징에서 열린 이동통신전화전시회에서 『국내 기업의 핸드폰시장 점유율이 올해말 15%로 늘어나고 2003년께에는 절반 이상 차지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렇지만 첫 단추가 잘 끼워지지 않는다. 노키아, 에릭슨, 모토로라 등 「서쪽 오랑캐」 단말기들에 가려 중국산 제품은 맥을 못추고 있다. 그런데 「왜」에 이어 「동이족」까지 만리장성을 넘나들고 있다. 특히 동이족이 만든 휴대폰은 다양한 기능과 예쁜 디자인으로 중국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다.

중국은 뭔가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WTO 가입을 앞둔 상태에서 마구잡이식으로 규제할 수 없었다.

다행히 오랑캐들의 기술방식이 서로 달랐다.

「이이제이(以夷制夷)」는 오랑캐에 둘러싸인 중국의 오랜 외교정책이다. 이 전략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한국과 협력해 자국 산업을 발전시키자는 통신산업 전략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이번 한국산 휴대폰 금수조치도 실제로는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적 포석으로 받아들여진다. 좋아하는 사람의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무관심한 척하는 것이라 할까.

어쨌든 한국은 이번 중국과의 마늘분쟁에 비싼 수업료를 냈다. 비쌌던 만큼 얻은 교훈을 잘 학습해야 할 것이다.

첫째 중국은 「시장」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다. 시장으로 유혹도 하면서 언제든지 칼을 휘두를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은 중국시장에서 유혹만 느꼈을 뿐 살기에 찬 칼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이번 분쟁으로 이를 제대로 알게 됐다.

두번째 교훈은 중국도 미국과 EU만큼 큰 무역 협상국이라는 점이다. 중국이 단지 우리 제품의 소비처가 아니라 우리의 소비생활을 지배할 수도 있는 나라다.

마지막 교훈은 우리가 중국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번 협상에서 한국의 약점이 뭔지 속속들이 파악해 대응했다.

반면 우리는 중국의 진짜 의도를 몰라 허둥지둥했다. 중국과 우리의 비교우위 품목이 뭔지도 몰랐다. 중국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것도 냄새만으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생마늘을 씹으면서.

중국 전문가들은 중국인들은 미엔즈(面子:체면)를 상했다고 하면 꼭 분풀이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일본 도시바도 얼마전 중국에 판 노트PC의 불량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중국인들에게 『미국이라면 모를까 그런 법률도 없는 중국에는 배상할 수 없다』라고 밝혀 혼찌검 나기도 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게 진정 아는 것이다」 공자의 말이다. 우리는 비로소 중국을 알게 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우리는 지금 마늘과 같은 중국산 농산물을 수입해 쓰지만 몇년 뒤에는 주요 전자제품이 될 것이다. 전자제품도 싸구려가 아닌 중고급 제품이 될 것이다.

중국은 아직 대부분의 인구가 농사에 종사하는 농민 국가다. 이점에서 이번 한·중 마늘 전쟁은 「진짜」 마늘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중국은 이제 농민국가를 넘어 전자대국으로 발돋움하려 한다. 「마늘 전쟁」은 머지 않아 「휴대폰 전쟁」 「TV 전쟁」 「반도체 전쟁」으로 바뀔 것이다. 그것도 동시다발적인 전면전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포성은 이미 울렸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한·중 마늘 분쟁 일지

-99년 9월 30일=농협, 중국산 마늘에 대한 피해조사 신청

-10월 11일=무역위원회, 중국산 마늘에 대한 피해조사 착수

-10월 27일=무역위원회, 중국산 마늘 잠정관세 부과조치 건의

-11월 18일=재정경제부, 중국산 마늘에 대한 관세율 30%에서 315%로 잠정 인상조치

-2000년 1월 12일=무역위원회, 농민대표 등 일반 상대 공청회 개최

-2월 2일=무역위원회, 마늘에 대한 관세부과 긍정 판정

-3월 17일=재경부, 관세부과 공식 결정

-4월 3일=김원길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정책위원장, 수입마늘에 대한 긴급 관세부과 발표

-4월말∼5월=관세부과 관련 한중 두차례 실무협상

-6월 1일=중국산 마늘에 대한 관세율 315% 부과 3년간 시행 결정

-6월 7일=중국,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중단 조치

-6월 29일=베이징서 한중 마늘협상 시작

-7월 7일=한중 마늘협상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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