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경제 환경의 장막을 걷어내기 위한 각종 법령 재정비 작업들이 진통을 겪고 있다. 전자상거래(EC)를 「현실」로 인정하는 기본적인 법제작업이 큰 진척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정부가 쏟아내는 규제개혁 방침 가운데는 홍보에만 여념이 없는 정책도 적지 않다. EC 활성화 차원에서 발표된 일부 법제 정비방안은 「생색내기」 냄새가 짙고, 화려한 수식과는 달리 최근 개정안 가운데는 졸속으로 마련된 경우도 있다. 산업자원부가 EC 주무부처로서 「전자거래정책협의회」를 주관하고 있지만 관계부처들과 손발이 맞지 않는데다 업계·단체들의 이해관계 조정력도 여전히 미숙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EC를 디지털경제대국의 전략축으로 설정한 가운데 최근 정책현안으로 제시하거나 개정중인 관련 법안정비 현황을 총 7회에 걸쳐 살펴보고, 바람직한 해결방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하지 않을 일이라면 「하는 중」이라는 발표도 말아야 할 게 아니냐. 전자자금이체(EFT)법 제정을 검토중이고 추진중이라는 말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지난 90년대초부터 정부의 EFT법 제정논의에 자문을 해왔던 모 대학교수의 비판이다. EFT법은 전자거래기본법, 전자서명법과 함께 EC의 3대 기본법. 주무부처인 재정경제부를 비롯해 금융감독위원회·산업자원부·정보통신부 등 관계부처와 이해단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법 제정의 필요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실태 =EC 관련 산업주체들과 법률 전문가들은 그동안 EFT법 제정의 필요성을 꾸준히 역설해왔다. 특히 산업육성을 책임지고 있는 산자부·정통부 양 부처는 정책발표 때마다 「EFT법 제정작업을 진행중」이라는 말로 정부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러나 정작 주무부처인 재경부는 실무 담당자조차 고개를 젓고 있다. 재경부 은행제도과 박광 사무관은 『EFT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지만 시장이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히 법제화를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면서 『우선 약관 등으로 시장 검증을 거친 뒤 법률화방안을 신중히 검토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인식을 놓고 법률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소 차이가 있다. 벤처법률지원센터 정영훈 대표변호사는 『국내에서도 이미 인터넷뱅킹 이용고객이 200만명에 이르고, 기업간(B2B) 결제시스템 도입이 추진되는 등 제도화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된다』고 반박했다. 경원대 법대 손진화 교수도 『민간기업의 개별약관 정도로 그칠 경우 금융기관이나 기업체는 고객보다 명백히 우월적 지위에 있을 것』이라면서 『우선 법제화 논의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금감위가 내부적으로 EFT법안 마련작업에 착수함으로써 경제부처 내에서도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디지털경제 핵심법안인 EFT법을 놓고 유관부처간에도 손발이 안 맞고 있는 셈이다.
△쟁점 =EFT법 제정을 둘러싼 쟁점은 강제적 성격의 법률이냐, 자율적 성격의 약관도입이냐로 압축된다. 금융기관과 이용고객의 책임과 권한을 명시한 EFT법의 경우 강제적인 규제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EC시장 동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반대론자들의 시각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은행권 등 이해당사자들의 반발도 한몫 거들고 있다.
재경부 관계자는 『이해당사자들의 의견대립을 조정할 만한 뚜렷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는 EFT법 도입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에 대해 정영훈 변호사는 『EFT법이 규정하고 있는 금융기관과 고객의 권리·의무사항은 사이버금융환경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명시하자는 취지』라며 『미국의 경우 핵심조항인 사고발생시 손실부담 및 면책요건을 법률로 규정해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EFT법 대신 제정작업이 진행됐던 「전자금융거래 기본약관」마저 은행연합회·금융감독원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의견 대립으로 물건너감으로써 법제화논의는 더욱 불투명하게 됐다.
성균관대 최준선 교수는 『약관이든 법률이든 전자금융거래의 기본적인 안전장치 마련은 시급하다』면서 『일단 현재로선 은행권과 고객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약관마련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전망= 최근 현안으로 부상한 B2B결제시스템(KEPS) 및 사이버금융서비스의 고객안전장치 도입여부가 당장 예상되는 문제점이다. B2B결제시스템의 경우 어음법 폐·개정논의의 연장선에서 앞으로 일부 법률의 손질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며, 제정이 지연되고 있는 약관도 은행권과 공정위의 지리한 대립이 이어진다면 대신 법제화 여론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손진화 교수는 『EFT법을 둘러싼 문제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이해당사자들간의 타협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해결점을 찾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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