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어시대의 민족어
복거일 저
사용자가 한 사람일 때 정보의 전달수단은 가치가 없어진다. 가령 한 사람만이 가진 팩스는 거의 쓸모가 없다. 팩스를 가진 사용자가 적어도 둘 이상은 돼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팩스나 인터넷과 같은 정보전달 수단은 실제 이런 식으로 망(네트워크)을 이루게 되는데 사용자가 늘 때마다 그 망의 가치는 사용자수의 제곱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이를 실증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메트컬프의 법칙」이다. 오늘날 영어가 거대한 사용자망을 형성하고 국제(표준)어로 부상한 것도 이 법칙에 의해 설명된다.
어떤 언어의 가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사용할 경우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쓰게 되면 그 가치는 폭발적(그러니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다른 언어에 비해 한번 우세한 언어는 점점 더 우세해지는 경향도 있다. 이 시대 국제어로서 영어가 바로 그러한 언어다.
오늘날 세계에는 영어 외에도 한국어·불어·일본어·아랍어 등 민족을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언어가 복잡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 영어가 국제어로 부상하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하나의 커다란 망 대신 여러개의 작은 망이 할거할 터이고 또한 그렇게 되면 메트컬프의 법칙이 가리키는 망의 이점도 제대로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수백개국 사람들이 모이는 유엔총회의 예를 들어보자. 만약 표준어가 없다면 총회는 매번 수백중의 동시통역 때문에 곤혹을 치러야 할 것이다. 국제간 뉴스전달·교역·상거래·문화교류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국제어에 대한 이익이 모든 이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국제어로 선택된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 비해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된다. 바로 이런 메커니즘 때문에 각국의 언어는 국제어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경쟁은 이를테면 포르투갈이 점령지인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하고 일제시대에 일본이 한국에서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식 영어가 이 시대의 국제어로 부상한 것도 그런 맥락의 하나임은 물론이다.
자끄 아탈리의 예측이 아니더라도 영어는 앞으로도 최소한 50년 이상은 국제어로서의 위치를 누리게 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어들은 점점 영어에 침윤돼 갈 것이고 영어와 민족어가 공존하는 2개 공용어(bilingual) 단계를 거쳐 종국에는 영어세상이 될 것이다. 인터넷은 지구촌시대를 촉진시킴으로써 이런 과정을 더욱 단축시켜 줄 것이다. 컴퓨터세계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가 이미 그것을 증명해 주지 않았는가.
자, 그렇다면 이런 사태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걸까. 이 시대 지적(知的) 산물의 80% 이상이 영어로 표현돼 있는 이 운명적 현실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한글로 쓰여진 우리의 소중한 민족자산을 포기하고 말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여전히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영어를 배우고 통역을 세우는 일을 계속할 텐가.
여기까지가 지난해 복거일이 영어공용화 논쟁을 불러 일으킨 전말이다. 복거일은 이때 영어공용화를 제안하면서 몇가지 전제를 뒀다. 첫째, 영어를 앵글로색슨족만의 언어(민족어)로 보지 말 것. 둘째, 이를 논할 때 민족주의의 시각을 배제할 것(그는 다른 저서에서 민족주의가 본질적으로 개인의 이기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논하고 있다). 셋째, (영어가 됐던 불어가 됐던) 국제어는 이미 그것을 쓰는 모든 이들의 자산이며 이제는 그들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 것.
결국 그의 『상당기간 영어와 한글이 공존하는 상태가 나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제안은 한국의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에서 복거일 논쟁이 잠잠해질 무렵 일본은 국정 최고 통수권자의 입을 빌어 국제어로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발표한다.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민족적 자부심이 덜해서였을까.
<논설위원 jsu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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