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벤처시대의 또 하나의 진리

이동규 국민벤처 사장

미국은 80년대 초부터 실리콘밸리를 세우고 국가 초고속망 건설과 정보인프라 구축을 준비해 15년의 장기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신대륙 건설과 서부 개척사에 근간을 둔 건전한 청교도정신, 건전한 자본주의 윤리가 있었다.

일본도 1868년 명치개혁을 추진하면서 화혼서용의 기치아래 오늘의 경제·기술·문화대국을 건설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일본기업 및 벤처의 뿌리이자 정신으로 승계되고 있다. 화혼이란 유학에 바탕을 둔 일본정신인데 일본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 화혼서용주의는 명치유신이래 지금까지 일본의 세계화 정신으로 이어져왔고 그 결과 「모방을 통한 재창조」라는 일본 특유의 부가가치를 창출해냈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기업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 쇼이치로는 철저한 화혼서용주의의 실천자들로 「절차탁마」라는 도닦기식 경영으로 일본 경제건설의 주역이 됐으며 일본 장인정신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과 일본의 예에서 보듯 경제대국·기술대국의 건설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개발에만 기인하지는 않는다. 개인과 조직사회 내면에 자리하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발상, 투철한 목적의식과 건전한 가치철학을 모태로 개발·진보돼 왔으며 이것은 지식·정보화시대, 벤처시대가 조직과 개인에게 요구하는 핵심의 가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 벤처기업의 육성과 발전도 단순히 고용창출이나 경제적 목적을 떠나 우리가 미래 글로벌 환경의 주역으로 성장하느냐 마느냐 하는 우리 민족사의 영욕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정체성 확립을 통해 미래를 개척해 나갈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벤처인 양성에 주력해야 하며, 이러한 인재양성의 수단이 막연하게 「혼을 심자」거나 「건전한 기업가 정신을 배우자」는 식의 주장으로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해방후 반세기를 우리의 대학들은 철저한 서양학문, 서양 과학기술을 신봉해 왔다. 학명과 학제, 심지어 학풍까지도 베껴왔고 그러다 보니 인촌 김성수, 호암 이병철, 연암 구인회, 아산 정주영 등 20세기 한국 산업사회 주역들의 세계화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동도서기」와 「격물치지」라는 우리식 경영철학, 과학정신을 외면해 왔다.

서울대가 지난 54년간 지켜 온 「VERITAS(진리)」 휘장을 바꾼다고 한다. 이는 반쪽의 진리만으로는 더 이상 참된 학문적 가치를 창조할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VERITAS의 어원적 개념이 실증적·객관적 사실만을 참된 진리라고 간주하는 데카르트적 시각에 바탕을 둔 논리라고 볼 때 서울대와 서울대를 추종해 온 전국의 대학들은 지금까지 동양적 진리를 외면해 온 것이 된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없는 종교(철학·정신)는 장님이며,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다」고 했다. 서구 VERITAS 숭배풍조가 그동안 우리를 장님으로, 절름발이로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암묵지의 명시지(실증적 논리, 과학)로의 전환에 대한 연구가 세계 경영학계의 관심사이고 보면 우리의 학계가 그동안 얼마나 절룩거려왔는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말로만 「혼을 가르치자」 「정신이 중요하다」는 식의 뜬구름잡는 주장은 그만둬야 한다. 그보다는 어떤 혼을 가르칠 것인지, 어떤 정신이 중요한지 구체적인 사례와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반세기만에 다시 시작하는 또하나의 진리찾기, 우리의 정체성확립 작업은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학문혁명이라는 새로운 각오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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