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의 경쟁에는 최소한의 지켜할 규칙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시스템통합(SI) 업체들이 참가하는 정보사업 수주전에는 경쟁 룰 자체가 없다.
한국전산원에서 일하는 S 박사는 지난 연말 한 지방 대도시의 정보사업 입찰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적이 있다. 공정을 기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심사위원들과 함께 호텔에 합숙까지 했으나 이미 그곳 분위기는 「공정」을 얘기할 차원이 아니었다.
공개해서는 안될 사업제안서의 회사명이 심사위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시 관계자들은 『평가표 대로 평가를 하면 이상한 결과가 나올 수 있으니 한 업체에 몰아주자』 『P사 제안서는 볼 필요도 없다』며 전체적인 심사 분위기를 특정업체로 몰아갔다.
결과는 예상대로 그 특정업체의 승리로 끝났고 경쟁에서 탈락한 업체들은 로비의혹을 제기하며 시 당국에 항의했다. 하지만 더이상 문제는 확산되지 않고 항의하는 선에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이처럼 문제가 용두사미로 끝난 데 대해 한 관계자는 『사업 수주에 뛰어든 회사 가운데 어느 하나도 떳떳한 업체는 없다. 다른 게 있다면 로비의 줄을 제대로 섰느냐, 못 섰느냐의 차이다. 그래서 SI업계에서 일하려면 아무리 억울해도 적당한 선에서 분을 삭일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SI 업계 영업맨들은 『발주된 프로젝트의 사업제안요구서(RFP)를 한번 훑어만봐도 사업 발주자가 어느 업체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알 수 있고 입찰이 시작된 후 돌아가는 판세를 조금만 보면 수주 업체의 윤곽은 거의 확실해진다』고 말한다. 그만큼 발주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나름의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가끔씩은 사업 발주자가 계획한 시나리오에 변수가 등장하면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갈 때도 있다.
최근 사업자를 선정한 한 국가공단의 정보화 프로젝트가 그 좋은 예다. 이 사업 초기단계까지만 해도 업계 관계자들은 제안요구서의 내용과 그동안의 정황을 근거로 I사의 수주를 100% 장담했었다. 하지만 사업이 진행되며 조직적인 비리 의혹과 함께 정치권 개입 소문까지 불거져나옴으로써 예상밖의 시나리오가 연출됐다.
『이 사업의 경우 의도 자체가 불발에 그친만큼 비리에 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사업에 뛰어든 사람이면 누구나가 문제점을 의식했을 정도로 뭔가 시도된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업자들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나 의혹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의지를 꿋꿋하게(?) 밀어붙인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오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회사 공금과 국민의 혈세가 새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A사 영업 관계자의 말이다.
따라서 SI 업계에서는 『지금처럼 기술이나 사업 수행능력에 대한 정확한 평가기준 없이 학연·지연·인맥 등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사업자가 선정되는 상황에서는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다』며 로비 관행을 없애려면 사업 발주자들의 기본적인 자세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SI 수요자측은 『국내 SI업체를 평가하는 일은 「도토리 키 재기」에 가깝다. 그만큼 기술력과 전문성 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다보니 외부적인 요소가 작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반박한다. 결국 SI 업체와 사업 발주자 모두가 국내 SI 시장 악순환의 주범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SI 전문가들은 『사업자 선정을 위한 세부적인 평가기준까지 규정할 수는 없는 문제인만큼 공정 경쟁 풍토를 조성하려는 업계의 자율적인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원론적인 대안과 함께 『건설 분야에서처럼 정보시스템 분야에도 사전, 사후 감리 기능을 강화, 사업추진 결과에 확실한 책임을 묻는 제도적인 장치 마련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지식 첨단산업으로서 SI업계의 자율성은 존중하되 사업수행에서부터 결과물에 이르는 제반과정을 상호 감시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객관적인 평가와 책임 기준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상돈기자 sdjo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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