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T 출범
60년대 이후 전자산업 분야 신기술 개발은 대부분 정부출연연구소가 주도했다. 민간차원의 과학기술 수준이 일천하던 70년때까지만 해도 정부출연연구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정부가 수출대체 또는 수출전략 품목 관련 신기술 개발을 특정 연구과제로 지정해 출연연구소에 맡기는 것은 관행이었다.
이렇게 개발된 신기술은 곧바로 민간기업들에 넘겨져 상용화되고 수출전략 상품으로 바뀌었다. 80년대 초반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64KD램이나 시분할전전자교환기(TDX1)의 개발, 교육용 컴퓨터 국산화 등의 프로젝트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빛을 본 것들이다.
출연연구소는 수출증대와 기술국산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성원에 힘입어 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필두로 79년까지 16개가 설립돼 각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부당국도 이들 연구소에 대해 기초과학과 기반기술 확보 차원의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79년까지 존재했던 16개 출연연구소 가운데 전자산업분야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곳은 KIST외에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한국에너지연구소·한국동력자원연구소·한국표준연구소·한국기계연구소 등이 더 있었다. 한가지 특징은 이들 연구소가 대부분 KIST를 출범 모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연연구소들의 출범 배경은 오일쇼크 등에 의해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이에 따른 임금상승 등이 원인이 됐다. 종래 저임을 바탕으로 한 국제경쟁의 비교우위 질서가 무너지면서 국내 산업환경은 큰 변화를 겪을 조짐을 보였다. 이같은 상황은 곧 경기침체를 가져왔고 산업정책의 근간인 수출에도 큰 타격을 줬다. 또한 국내에 진출한 외국기업들에도 직접 영향을 주면서 국내투자는 거의 중단됐고 작업장마다 노사분규가 끊이질 않았다.
외국기업들의 투자위축은 그러나 반대로 전기전자통신산업의 기업구조를 내국인 기업 중심으로 재편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관련 산업정책의 수요가 증대되고 기술집약화를 위한 자주적인 연구개발체제 확립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던 것이다.
이같은 여론을 파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77년부터 시작하는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행을 앞두고 과학기술정책의 틀을 새로 짜도록 지시하는데 그 개편의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KIST 역할의 재정립이었다. 이를테면 기초과학연구 등 기업과 단위연구소들이 할 수 없는 국책과제는 KIST가 맡고 통신과 전자 등 응용부문은 단위연구소들을 독립시켜 전담하게 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76년 말 대통령령으로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이 마련되고 이 법에 따라 KIST에서 KTRI·KIET·한국화학연구소·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한국표준연구소·한국자원개발연구소 등 여러 단위연구소 등이 갈라져 나왔던 것이다.
이 가운데 전자·컴퓨터·반도체 국산화와 직접 관련된 것이 KIET다. KIET는 KIST 전자계산부(뒤에 시스템공학센터가 확대발전함) 산하 또 하나의 조직인 전자계산기운영실과 전기·전자연구부 산하 반도체 재료연구실 소속 연구원들을 축으로 구미 전자공단에서 발족한 상공부 소속의 연구소였다. KIET는 제조기술의 연구개발 부문을 산학연의 연결고리로 삼는다는 방침 아래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발기인이 돼 설립됐다.
정부가 가장 많은 공을 들였으며 연구소 규모도 가장 컸던 KIET의 출범에는 정부출연 41억원, 민간출연 10억원, IBRD 차관 1100만달러 등 모두 106억원의 거금을 투입했다. 또 애당초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이 연구소의 출범일정이 포함됐던 터라 당시 경제정책 최고 기구였던 무역진흥확대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그 전모가 보고됐을 만큼 비중이 컸었다. 처음부터 구미 전자공단에 부지 3만평을 매입해서 78년 6월까지 컴퓨터·반도체 전문 대단위 기술연구용 단지를 건설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KIET 설립에 대한 정책이 구체화된 것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75년이다. 이에 앞서 당시 전자산업과 수출정책을 총괄하던 상공부는 69년부터 시작한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의 2단계(72∼76년)에서 전자산업 개발체제의 확립을 위한 기본목표를 제조기술의 연구개발, 양산체제의 확립, 생산의 합리화 등 3가지에 두고 사실상 KIET 출범의 사전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KIET의 출범은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 이후 3가지 목표를 안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연구기반의 구축인 셈이었다.
출범과 함께 KIET 초대 이사장에는 금성사 사장과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장을 겸하던 박승찬이 임명됐다. 이는 한국전자공업회장이 당연직으로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이사장을 겸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초대 연구소장은 제2대 KIST 소장을 역임한 한상준(현 한양대 명예총장)이 내정됐다.
연구소의 기본 운영방침은 그동안 과기처 산하 KIST의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중심으로 진행해온 컴퓨터와 반도체 부문의 연구개발활동을 한곳에 집중시킨다는 것이었다. 즉 KIST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정부출연기관으로 전환시켜 상공부 통제 아래 놓는 것이었다.
KIET는 79년 구미 연구단지가 완공될 때까지 서울 사당동과 역삼동 임시 사무실을 전전하면서도 16비트 및 32비트 초소형(마이크로) 컴퓨터에 대한 유닉스 운용체계 이식기술, 8비트 및 16비트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에 착수하는 등 안팎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각종 반도체의 설계와 제조공정 및 양산기술의 국산화를 추진하는 것도 이 연구소의 몫이었다. 초창기에 VCR용 바이폴라 집적회로(IC)등의 자체 개발은 우리나라가 VCR 수출 상위권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KIET는 또한 컴퓨터 하드웨어(탁상용 전자계산기 또는 중형 전자계산기) 국산화에 대단한 의지와 열의를 보였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 성장률은 매년 고무줄 늘어나듯 신장되고 있었는데 예컨대 주력 수출품목이던 흑백TV는 69년 이래 연평균 39%라는 놀라운 신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더욱이 흑백TV는 66년 부품 국산화율이 20%에 그쳤던 것이 69년 브라운관, 그리고 77년 브라운관 유리까지 국내기술로 생산함으로써 외화 가득률이 그 어느 분야보다 높았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국산화 추진 분위기는 바로 흑백TV의 신화를 재창조하자는 뜻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당시 KIET에서 컴퓨터 국산화를 사실상 진두지휘한 이가 바로 이용태(삼보컴퓨터 명예회장)다.
70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용태는 76년 KIST 컴퓨터국산화연구실장으로 재직하다 78년부터 KIET 부소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그가 이 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이 국내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 시제품인 「HAN8」이다. 「HAN8」은 잘 알려졌다시피 81년 삼보전자엔지니어링(현 삼보컴퓨터)이 발표한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SE8001」의 원형이 된 개발품이다.
「HAN8」의 발표는 흑백TV 이후 각종 전자기기 국산화에 매우 적극적이던 업계 분위기에 큰 영향을 줬다. 컴퓨터 국산화에 적극적이던 곳은 삼성전자·금성전기·동양전산기술(현 두산정보통신 전신)·고려시스템산업(92년 폐업)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삼성전자는 때마침 미국 휴렛패커드와 제휴해 OEM방식의 미니컴퓨터 생산을 추진하고 있었고 금성전기는 일본 NEC의 미니컴퓨터 생산을 계획하던 중이었다. 또 동양전산은 이미 75년부터 미국 DEC와 합작생산체제에 돌입했고 고려시스템·금호실업·금성통신·쌍용양회·선경 등도 외국회사와 기술제휴선을 찾던 중이었다.
한편 KIET와 출범시기가 비슷한 KTRI는 KIST의 전자계산부 산하 전자계산연구실과 KIST의 전기·전자연구부 산하 방식기기연구실 소속 연구원들이 주축이 돼 76년 12월 KIST 부설 연구소로 충남 대덕단지에서 발족했다. 그런 다음 1년 뒤인 77년 12월 소속이 과기처에서 체신부로 바뀌면서 KIST로부터 조직이 완전 분리됐다.
KTRI의 출범은 지난호에서 언급했던 사설전자교환기 개발을 위한 「메모콜」 프로젝트 추진과정에서 얻은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실제로 메모콜을 담당했던 KIST 제2연구 담당 소장 정만영, KIST 방식기기연구실 실장 안병성, KIST 전자계산부 소속 책임연구원 천유식 등이 그대로 KTRI 출범 멤버가 되기도 했다.
KTRI는 81년에 상공부 산하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와의 통합을 거쳐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로 명칭이 변경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교환기 국산화 등 통신분야 연구의 산실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70년대 중반 이후 우리 나라 전자정보통신산업 부문의 출연연구소는 과기처 소속의 KIST(기초과학), 체신부 소속의 KTRI(전자통신), 상공부 소속의 KIET(반도체, 컴퓨터) 등 3두체제라는 진용을 갖추게 된다.
3두체제가 마감하고 KIET와 KETRI가 통합된 것은 5공화국 시절인 84년 12월 29일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장관협의회는 KTRI와 KIET의 통합을 전격 의결하게 되는데 그 결과 85년 1월 발족한 연구소가 바로 현재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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