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24);제 2부 산업의 태동 (15)

컴퓨터산업의 형성

 우리나라에서 컴퓨터산업이 태동한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컴퓨터가 처음 도입된 시기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컴퓨터를 처음 생산한 시기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는 이런 견해 차이의 대표적인 사례다. 전자의 시각은 산업의 정의를 가령, 「농림어업·제조업·건설·서비스·유통업·금융업 등 인간이 생계유지를 위해 일상적으로 벌이는 모든 생산적 활동」으로 규정했을 때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산업의 정의를 좁은 의미로 「제조업과 그에 부수된 업종」으로 규정했을 때는 후자의 시각에 타당성이 주어진다.

 전자의 경우 태동 시점은 1967년 한국 최초의 컴퓨터회사인 한국IBM의 출범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동양전산기술(두산정보통신의 전신)이 컴퓨터 하드웨어를 OEM방식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1975년이 기점이 된다. 하지만 1975년을 기점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우선 하드웨어와 함께 컴퓨터를 구성하는 소프트웨어의 개발이나 유지보수 등은 이미 한국IBM의 출범 시기부터 이뤄졌다는 사실을 들 수가 있다. 즉 단순히 하드웨어의 제조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태동 시점을 1975년으로 늦춘다는 것은 컴퓨터산업의 특성상 모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1967년 4월 한국IBM이 출범한 때를 전후한 시기,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IBM이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현 통계청)에 국내 1호 컴퓨터인 「IBM1401」을 공급한 때를 태동 시점으로 보고 이야기를 전개하려 한다.

 1967년 4월25일 인천항을 통해 곧바로 서울 광화문 경제기획원 청사에 옮겨진 「IBM1401」은 두 달 동안의 설치작업을 거쳐 6월24일 12시30분 가동식을 가졌다. 이 역사적인 장소에 박정희 대통령이 빠질 리가 없었다. 장기영(張基榮)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기형(金基衡) 과학기술처 장관, 김학렬(金鶴烈)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함께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담당 사무관의 브리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컴퓨터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날자 한 석간신문은 「IBM1401」의 제원을 다음과 같이 전함으로써 이들 참석자의 표정 묘사를 대신했다.

 『…이 계산기는 시가 40만달러에 해당하는 것으로 통계국은 IBM회사에 대해 매달 9000달러의 사용료를 내고 빌려쓰게 된 것이다. 이 전자계산기의 성능은 1초에 6만자를 읽을 수 있는 고성능의 것으로, 예를 들면 아직 세밀한 분석을 해보지 못한 지난 66년의 인구조사결과를 완전히 분석하자면 통계국 직원 450명과 2억1000만원의 돈 그리고 14년 반의 시간이 걸리는데 이 기계를 쓰게 되면 9000만원의 돈과 시간은 1년 반으로 단축할 수 있다.』-1967년 6월24일 동아일보

 「IBM1401」의 도입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었다. 1965년 말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은 1966년의 간이 인구센서스를 앞두고 처음으로 자료처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당시의 인구센서스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71년)의 추진에 필요한 인구 및 주택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늦어도 1967년 중에는 그 처리결과가 나와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앞의 신문보도에서처럼 수작업으로 처리할 경우 그 시기를 담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컴퓨터 도입을 결정한 이가 그 당시 경제기획원 차관 김학렬이었다.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자리를 옮기기 직전인 1966년 초 김학렬은 그 자신 스스로 도입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기종 선정에도 직접 개입했다. 이렇게 해서 도입 추진 1년 반 만에 한국 땅을 밟게 된 것이 「IBM1401」이었다.

 「IBM1401」의 도입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컴퓨터시대를 열었다는 역사적 평가 외에도 컴퓨터의 필요성을 정부가 앞장서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컴퓨터가 대량으로 보급되고 활용될 것임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두번째로 컴퓨터 도입을 추진한 곳은 한국생산성본부였다. 생산성본부는 1966년 IBM본사 직원인 이주룡(李珠龍, 현 KCC정보통신 회장)을 영입하여 재단법인 한국전자계산소를 출범시키고 컴퓨터 도입작업을 맡겼다. 생산성본부는 한국전자계산소를 통해 정부기관과 민간기업의 전산용역을 도맡다는 계획이었다. 도입 기종으로 결정된 일본 후지쯔신기제작소(富士通新機製作所)의 「파콤222」가 서울 회현동의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1967년 5월이었다.

 그러나 이즈음 경제기획원 외에도 정부기관·금융기관·학교·기업 등 수십여곳이 독자적으로 컴퓨터를 도입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으므로 한국전자계산소의 계획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또한 「전산기초 프로그래밍 강좌」 등 여러 가지 대외사업을 벌였지만 조직 자체가 재단법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생산성본부는 결국 1971년 한국전자계산소를 소장이던 이주룡에 넘겨 민영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때 재단법인에서 주식회사로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는 회사가 KCC정보통신이다.

 한국IBM은 경제기획원과 미국IBM의 해외 법인업무를 관장하던 IBM월드트레이드사간의 합의에 의해 「IBM1401」의 기술지원과 유지보수를 위해 설립됐다. 정부는 1967년 3월21일 「전자계산기와 영업용 기기, 자료정리용 또는 기타 목적에 사용되는 정보 조정체계, 전동타자기, 구술기록기 및 각종 업무용 기기의 제조·임대·판매·용역의 제공」을 목적으로 한 IBM의 투자인가신청서를 허가했다. 불입자본금 360만달러는 설립일로부터 18개월 이내에 채워 넣겠다는 조건이었다.

 IBM에 이어 1967년 9월 미국의 컨트롤데이터코퍼레이션(CDC)도 불입자본금 50만달러 규모의 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를 출범시켰다. CDK는 원래 비슷한 시기에 진출한 모토롤러·페어차일드 등과 함께 반도체 조립생산을 시도했으나 1969년 9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산실에 초대형 컴퓨터 「CDC3300」의 공급을 계기로 업종을 컴퓨터 분야로 바꿨다.

 1968년 10월에는 미국의 무역회사 플랜클럽과 지금의 벽산그룹 계열인 동양물산이 8 대 2의 비율로 한국유니백을 설립하고 「유니백」 컴퓨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기종은 IBM에 이어 세계시장 점유율 2위를 달리는 미국 스페리랜드(Sperry Rand)가 공급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서흥전기(1989년 현대테크시스템에 합병)가 미국 버로스(Burroughs)사의 「버로스」 기종을 공급키로 하는 대리점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앞서 1967년 1월에는 동아무역이 미국 NCR의 한국대리점 계약을 맺었다. 처음에는 NCR의 펀치카드시스템과 현금등록기 등을 공급하던 동아무역이 컴퓨터 공급에 나선 것은 1968년 6월 한일은행에 「C­500」 기종을 공급하면서부터다.

 한국전자계산소에 「파콤222」를 공급한 후지쯔신기제작소는 한국내에 판매나 기술지원 거점이 없었으면서도 한양대학교·국립건설연구소 등을 고객으로 확보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후지쯔가 공급한 컴퓨터는 한국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받아오기로 한 대일청구권 자금에 해당되는 현물 성격을 띠고 있어 산업적으로 그다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때만 해도 일본의 컴퓨터 제조기술은 초보단계를 갓 벗어난 시점이어서 국내 수요가 집중돼 있던 미국 컴퓨터 기종에 비해 경쟁력이 크게 뒤떨어지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해서 1969년까지 국내에 도입된 컴퓨터를 공급사별로 보면 IBM이 6대, 스페리랜드가 5대, 후지쯔가 4대 그리고 CDC와 NCR가 각각 1대씩 모두 17대였다. 컴퓨터를 도입한 곳들로는 앞서 언급한 곳 외에 유한양행·국립보건연구원·육군본부·한일은행·산업은행·서강대·연세대·락희그룹 등이다.

 하드웨어 공급회사의 등장과 동시에 전산용역 그러니까 소프트웨어 개발업무만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도 생겨났다. 1967년 9월 발족된 KIST전산실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하버드대 기계공학 박사 출신의 젊은 엘리트 성기수(成琦秀)가 이끌던 KIST전산실은 1960년대 준비기간을 거쳐 1970년대 한글정보화와 수많은 사회기간시설 전산화를 추진함으로써 산업적으로 엄청난 컴퓨터 수요를 창출해 냈다.

 한편 민간기업 가운데 컴퓨터를 처음 도입한 곳은 유한양행으로 기록돼 있다. 유한양행은 경제기획원의 「IBM1401」을 1년 만인 1968년 5월에 중고품으로 들여왔다.(경제기획원은 이때 IBM의 「시스템/360」을 새로 들여왔다)

 그러나 당시 국내외 컴퓨터 환경은 「시스템/360」, 스페리랜드의 「유니백9400」, CDC의 「CDC3300」 등 고성능 3세대 기종이 주도하던 상황이어서 1959년에 제조된 2세대 기종 「IBM1401」로는 더 이상 새로운 전산개발이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경제기획원도 원래는 1년 만에 「시스템/360」으로 업그레이드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IBM1401」을 들여온 것이었다. 유한양행은 결국 이 중고기계를 제대로 활용해 보지도 못한 채 또 다른 기업에 넘겼다. 천덕꾸러기가 된 「IBM1401」은 유한양행 이외에도 여러 곳을 전전하다 현재는 대덕단지의 국립중앙과학관에 실물 그대로 전시돼 있다.

 유한양행에 이어 두번째로 컴퓨터를 도입한 민간기업은 락희그룹이었다. 락희는 1969년 11월 IBM으로부터 최신 기종인 「시스템/360­25」를 도입하여 계열사인 락희화학과 금성사의 업무를 전산화하기 시작했다. 락희그룹은 1968년 1월부터 구인회(具仁會) 회장이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는 가운데 「EDPS도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업무량 분석에 나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컴퓨터시대를 맞이했다. 락희화학의 컴퓨터 도입과 그 준비과정은 1970년대 다른 민간기업들에 모델이 됐고 결과적으로 컴퓨터업계의 영역 확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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