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구성과는 점차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아마 올 가을 쯤에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나는 지금 워싱턴DC에 와 있는데, 조금 전에 로버트 헤밍웨이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광주에서 엄청난 데모가 일어났다면서요? 군부의 강경진압으로 많은 광주시민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학살이라니. 이곳에서 본 한국이 얼마나 미개한지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군부는 정치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김대중을 죽이기 위해 모종의 작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제럴드와 헤밍웨이는 「당신의 사령관이 당신의 선배를 체포했다」는 표현을 씀으로써 나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 역사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축에 관련이 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아주 암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그렇지 못했는데, 외국에 나와 보니 갑자기 애국자가 된 기분이 들면서 국내의 정치 현실에 민감해지는군요. 이곳의 교민들이 모이기만 하면 한국의 정치와 군부의 동향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된답니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자유스럽게 토론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국내와 다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후퇴하여 20년이나 뒤로 돌아간 느낌이 듭니다.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도는 것과 같은 역사의 후퇴는 우리 모두의 슬픔이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릅니다. 당신이나 당신의 오빠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거대한 항공모함과 같아서 그 속에 타고 있으면 실감을 못하게 됩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하며, 쉽게 방향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계 속의 부속처럼 생각없이 작동할 뿐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역사가 심판을 하게 되면, 그때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하게 되지요. 만약 그 부속이 하나 멈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중지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부속을 갈아끼우면 되니까 아무런 힘이 없다고 믿지요.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하잘 것 없고, 작은 부속이라고 해도 부속과 부속이 모여서 하나의 기계를 만드는 것이며, 부속들이 동작을 멈추면 큰 기계도 작동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하잘 것없는 존재였다느니, 아주 미세한 부속의 위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변명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으로 역사의 오류에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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