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수 컴픽스 대표
4년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던 「NAB국제방송전시회」에 참가했을 때의 일화다. 그때 전시회에 사용할 물품들을 박스에 담아가지고 LA로 들어가려다 체크를 당했다. 종전에는 더 큰 짐이 있어도 별일없이 통과됐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날따라 세관원이 버티고 있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 밀수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갖고 갈 수 있는 물건들이라 여겨 쉽게 통과될 줄 알았는데 세관원은 박스는 물론 옷가지가 들어있는 다른 짐들도 하나 하나 무려 2시간 가량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었다.
내가 전시회에 가져갈 물건이라고 참가증명서까지 보이면서 항의했더니 마침내 그의 상사가 「무죄판정」을 내려주었다. 그러자 얄밉도록 그렇게 까다롭기만 하던 그 세관원은 나에게 『좋은 성과를 얻기 바란다』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황당하고 창피해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으나 생각해 보니 그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외국에 나갈 때 짐은 화물편으로 보내고 옷가지만 들고 입국하는 버릇이 몸에 익어버렸다.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서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 그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과오 중의 하나가 바로 상황에 따라 원칙이 자주 바뀐다는 것이다. 그 미국 세관원이 그날도 적당히 넘어가 주었다면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계속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그 세관원이 내가 더 이상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을 미리 막아 준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 경찰관도 마찬가지다. 경찰관들의 행동을 TV카메라가 쫓아다니면서 리얼하게 취재하는 「캅스(COPS)」라는 TV프로가 있다. 시청 주변에 데모대가 봉급인상을 요구하며 피켓을 하나씩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때 예외없이 경찰관이 개입한다. 언제 준비했는지 노란색 띠를 둘러놓고 데모대가 그 노란 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만약 그 띠를 무시하고 나오는 과격분자는 순식간에 여러 경찰이 달려들어 인정 사정없이 수갑을 채워 연행한다. 선량한 시민에게는 깍듯이 예우를 하지만 일단 범죄자로 의심받거나 원칙을 어기면 더 이상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범죄자들에게 경찰관들이 희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경찰관들이 원칙에 입각, 자신의 의무를 다해 법이 준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행동을 하는 세관원과 경찰관을 주민들은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런 믿음은 은행과 기업간에도 있고, 공무원과 시민들 속에도 있다.
미국에서는 서로 믿고 물건을 외상으로 주지만 약속을 어기고 돈을 갚지 않는 장사꾼은 두 번 다시 일어서는 것이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미국의 근간이 되는 신용사회다. 미국이 이런 신용사회를 일찍부터 정착시키지 않았더라면 넓은 땅덩어리와 다양한 인종을 관리하기가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가 하루 아침에 신용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정직한 정치인과 현명한 행정가가 많이 나와 다음 세대 교육에 이 원칙을 심어준다면 우리는 불가능이란 말 대신에 희망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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