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신문사가 후원하는 「정보통신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임」은 지난 15일 프레스센터에서 성기수 박사(엘렉스컴퓨터 고문)를 초청, 「디지털시대의 대비」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 이날 모임에서 우리나라 컴퓨터 도입 초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온 성기수 박사는 IMF 국가위기 극복을 위해 바람직한 디지털정부의 위상, 교육과 조세제도의 개혁에서 디지털 정치혁명 등 분야별로 미래 정보화시대를 준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성기수 박사는 국가역량을 집결시켜 효율적인 산학협동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우리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슈퍼컴퓨터 도입에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있었던 강연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
<> 정보인프라 구축 방향
지금 세계는 디지털 미디어혁명으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때 우리나라가 더 이상 실수하지 않고 기술문명의 흐름을 제대로 타려면 먼저 정보산업에 필수적인 사회간접자본(SOC)을 잘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정보의 운송을 위한 「통신망」, 정보 저장기술인 「데이터베이스」, 정보 가공기술인 「컴퓨터」 등 정보SOC의 세 분야에 균형잡힌 투자를 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도 정보산업을 위해 상당한 투자를 해왔으나 주로 정보가 흐르는 선(통신망)에만 치중해온 결과 정보를 저장하는 데이터베이스(DB)분야는 대단히 취약한 실정이다.
혹자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세계 어디서나 자유롭게 정보를 검색할 수 있기 때문에 자체적인 DB 구축의 중요성을 낮춰 보기도 하지만 이는 무지의 소산이다. DB는 그 속성상 정보수집자의 이해관계가 투사되게 마련이며 인터넷 수요가 폭증할 경우 심한 정체현상으로 인해 원하는 정보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우리나라에 필요한 정보를 적절한 형태의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는 일은 디지털시대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대만의 고궁박물관이나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등은 이미 소장품을 멀티미디어 자료로 제작해 그 국가의 정체성을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풍부한 문화·관광자원과 전통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국가적인 DB망을 구축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정보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는 DB분야 못지 않게 정보의 가공능력(슈퍼컴퓨터)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정보가공능력은 올초 기준으로 일본의 18분의 1, 미국의 5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 대학의 슈퍼컴퓨터가 1초에 2백억번 연산기능을 갖는 데 비해 일본 대학은 그 30배 성능의 인공지능탑재 슈퍼컴퓨터로 연구논문과 신물질 개발에 사용하고 있다. 지난 88년 당시만해도 세계 정상급 성능이었던 우리 대학의 슈퍼컴퓨터는 올해 3호기 도입계획이 연기됨에 따라 국제적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 연간 1백억원 내외에 불과한 슈퍼컴퓨터관련 예산을 7백억원 수준으로 높여 국내 대학의 기술경쟁력을 높이고 「국립슈퍼컴퓨팅센터」를 설립해야 한다.
대학이 2개 밖에 없는 싱가포르의 경우 국가에서 슈퍼컴퓨팅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3개의 대학을 가진 스위스도 슈퍼컴퓨팅센터 2곳을 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슈퍼컴퓨터는 각종 충돌실험과 설계분야, 기상예측 등을 비롯해 과학기술 전반에 파급효과가 대단히 크므로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이 절실히 요구된다.
<> 산학협동체제 강화
최근 우리 경제를 어렵게 만든 주요 현안 중 하나가 자동차산업이다.
국내 자동차산업은 생산능력 면에서 이미 세계 5위권에 진입할 정도로 눈부신 양적 성장을 달성했으면서도 이에 걸맞은 기술축적을 이루지 못한 탓에 현재의 위기를 맞고 있다. 부실경영을 한 자동차회사의 부채를 무조건 탕감하고 주인만 바꾸는 식의 구조조정은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 고만고만한 품질로는 제값도 못받고 다시 부채가 늘어나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뿐이다.
대만은 우리보다 10년 앞서 시장개방을 한 결과, 외산에 밀려 자국산 자동차와 가전산업이 소멸했지만 경쟁력있는 다른 산업분야에 집중해 건실한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국가경제를 위해서 자동차산업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한국이 OECD 가입국인 이상 민간회사에 직접적인 지원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꼭 자동차산업을 살리려 한다면 독일식 산학협동모델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벤츠·BMW 등 자동차회사들이 모여 있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지역은 슈퍼컴퓨터를 갖춘 우수 공과대학이 집결한 곳이기도 하다. 자동차회사는 대학에 자금지원을 하는 대신 학생들이 개발한 신기술을 바로 생산에 활용하는 이상적인 산학협동을 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외국의 기술을 도입하기에만 급급해 대학과 기업을 연결하는 산학협동을 등한시해 왔다. 정부 과학기술정책의 상당부분을 자동차기술 개발 쪽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독일대학보다 우수한 슈퍼컴퓨터를 도입하고 유기적인 산학연계체제를 도입할 경우 수년 내로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 디지털정부 구현
막강한 권력기능으로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부조직은 그 대부분의 기능이 정해진 형식 대로 자료를 처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역할 중 정보기술을 이용해 자동화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이같은 정부기능의 디지털화는 우리나라를 기업하기 좋고 국제경쟁력을 갖춘 선진국으로 만드는 선결조건이다.
정부기능의 디지털화가 가능한 분야로 조세행정을 들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조세제도는 불합리한 측면이 너무 많아 국가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총 1백80만명에 달하는 전문직·자영업자들이 소득세 징수의 사각지대에서 월급생활자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세금부담을 하고 있다. 여기에 각종 부가가치세를 면제받는 사업자층도 2백10만명에 달한다.
정치논리와 경제논리가 복잡하게 얽힌 조세규정을 적용하다 보면 부정부패의 소지가 생기게 마련이고 여러가지 조세정책을 조금씩 수정하는 방식으로는 행정효율을 높일 수 없다.
나는 소비과정에만 세금을 매기는 「에너지소비세」제도의 도입을 제안한다. 우리나라에서 연간 들여오는 에너지 수입은 약 2백75억 달러에 달한다. 이 수입화석원료(석유·석탄 등)에 2백30% 정도의 에너지 소비세를 부가할 경우, 올해 정부재원인 80조원 규모의 세수는 거뜬히 달성할 수 있다. 또 에너지소비세 외의 모든 세금은 폐지하고 대한민국을 세금천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조세행정의 완벽한 전산화와 투명성이 보장되며 이른바 지하경제란 것도 사라지게 된다.
일체의 수입에너지에 대한 중과세 정책으로 이미 구미선진국에서는 화석연료 억제와 환경보호를 위해 C 택스(Tax)제도를 시행 중이다.
기존 조세전문가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황당한 제안이겠지만 이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얻는 이점은 엄청나다. 에너지 소비세제도가 시행될 경우 우선 화석연료를 많이 쓰는 공해유발산업이 퇴출되고 정보서비스·금융산업 위주로 경제가 재편되어 환경친화적인 산업구조를 갖게 된다.
세금이 없어져 자동차가격이 싸지는 대신 값비싼 휘발유 때문에 자동차 주행이 억제되어 도시공기가 훨씬 맑아지는 동시에 연간 에너지 수입액도 30% 이상 절약할 수 있다.
세금이 없는 홍콩이 세계 제일의 쇼핑천국으로 번영을 누렸듯이 한국도 관광·쇼핑분야에서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된다. 에너지절약을 통한 환경친화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방해하는 세금·규제의 철폐를 통한 이상적인 경제번영을 우리가 성취할 경우 현대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는 정보사회의 대안이데올로기로 발전할 것이다.
정부 기능 중에서 교육분야도 개혁이 시급하다.
소생불능의 식물인간 한 명을 살리는 데 드는 비용은 정상적인 사람의 10배에 달한다. 우리나라 교육정책의 가장 큰 모순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교육정책에 적용하지 않는 데 있다. 사회와 기업체의 수요는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데도 대학정원과 학과별 인원은 요지부동이다.대학 스스로 경쟁력없는 학과는 퇴출하고 우수한 학과에 재원을 집중시키는 풍토가 필요하나 우리 대학 현실에서는 이런 구조조정도 여의치 않다. 교육부에서 사립대학교 총장의 자격까지 심사하고 온갖 규제로 자율적인 성장여지를 제한한 결과 우리 대학은 권한이 주어져도 제대로 활용 못하는 형편이다.
디지털시대 정부의 교육정책은 최소한의 규제를 통해 학생들에게 교육시장에서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주고 학교마다 정보인프라를 잘 갖추도록 지원을 늘리는 데 촛점을 맞춰야 한다.
<> 정치구도의 재편
앞으로는 사이버공간에 모인 시민의견이 국정에 반영되는 디지털 정치시대가 열릴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출현으로 중세 서구의 정치·사회구도가 큰 변화를 겪었듯이 현재의 전자미디어혁명도 구태의연한 정치행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중의 시민이익을 직접 대변하는 사이버 정당조직이 활동할 경우 비효율적인 기성 정치조직은 존재가치를 잃어갈 것이다.
이러한 개혁을 위해서는 오락성과 개인 위주로 흐르는 작금의 사이버문화를 좀더 조직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적 역량을 모아 단시일 내에 목표를 달성한 사례가 많았다.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원폭을 개발하고 스푸트니크 충격 이후 교육제도까지 개혁하면서 노력한 결과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켰듯이 우리도 정부·기업·학계의 역량을 집결해 디지털시대에 대비한다면 현재의 경제난을 도약의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정리=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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