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자산업은 세계에서 4, 5위의 매출을 기록하며 국내 경제를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오고 있다. 특히 반도체·통신장비·가전제품은 성능과 가격면에서 국제적으로 최고 내지 이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고도의 생산기술과 값싼 노동력, 효과적인 마케팅의 덕택이겠지만 그동안 잘 계획된 개발사업과 전문적인 연구조직, 예측된 시장수요 등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분야는 경기가 어려워도 잘 견디고 있으며 앞으로의 희망도 매우 밝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쟁력에서 우수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컴퓨터산업은 여기에서 제외돼 있다.
한국의 컴퓨터 하드웨어·소프트웨어·시스템·응용산업의 국제경쟁력은 미미하다. 부품생산, 해외 현지법인에 의한 소수품목의 예외가 있지만 하드웨어를 벗어나면 내세울 것이 없다.
따라서 최근 국내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컴퓨터 관련 산업은 대기업·중소기업 모두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고 많은 회사가 사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국내 자생적인 대표 소프트웨어 회사인 한글과컴퓨터가 곤경에 빠지고 PC제조업체들도 이윤없는 치열한 판매전에 돌입한 상태를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중대형 서버 컴퓨터는 외국에 종속됐고 가장 성장전망이 밝은 인터넷 관련 컴퓨터산업도 라우터·근거리통신망(LAN)·보안장비 등에서 대부분 크게 취약하다.
그러면 국내 컴퓨터 관련 대학의 경쟁력은 어떠한가. 컴퓨터학부·전산과학과·컴퓨터공학과 등의 이름으로 매년 1만명 이상의 학부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으나 대부분이 전공·실무교육을 충실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취업해 결국 경쟁력이 약한 상품을 만들어낼 뿐이다. 매우 비싼 등록금을 내가며 학부 4년 동안 배운 지식을 실제 현장에서는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대학원의 경우 연구실적이 최근 급속도로 향상돼 국제 최고 수준의 학과도 국내에 등장하고 있으나 국내 컴퓨터산업 기반이 취약한 상태여서 큰 연구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따라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진로지도를 하기가 퍽 난감하다. 세계 제일의 부자가 컴퓨터 전공자이고 작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몇 년 안에 엄청난 회사를 만든 많은 예가 컴퓨터 분야인 것이 사실이나 모두 미국의 예일 뿐이다. 이런 성공모델이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학생들에게 무슨 비전을 어떻게 줄 것인가.
한국 컴퓨터산업의 미래는 철저한 자기분석과 반성이 먼저 있은 다음에 계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나 국회에서 정보화에 관한 것과 정보기술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나라의 많은 컴퓨터 관련 단체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대학에서 좋은 교육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는지, 컴퓨터업체들이 현상유지에 급하고 미래대비를 소홀히 하지 않는지, 대규모 국책사업·연구개발·공동연구 등이 낭비없이 잘 이루어져 왔는지 우리는 이런 것을 하나하나 살펴서 거품을 걷고 실리적이고 실현가능한 모델을 만들어야 하겠다.
컴퓨터산업에서 성공한 모델은 어떻게 생겨날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정확한 시장수요 분석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개발해서 생산만 하면 저절로 시장이 형성되거나 정부에서 판로를 책임져줄 것이라는 가정은 이제 무모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자신에게 기술개발 능력이 있는지를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기업의 개발 및 생산능력이 취약한 상태에서 외부 연구용역이나 하청만으로 최고의 상품을 만들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이런 조직이 아직도 많다.
전문지식을 깊게 파고드는 자세도 필요하다. 주기판 제조 전문회사가 웹페이지 제작에 뛰어들어 쉽게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터넷이나 인트라넷이 유망하다고 여러 회사가 생기는 바람에 전문인력 부족으로 제대로 된 상품을 보기 힘들다. 자신이 강한 분야와 남이 강한 분야를 합해 좋은 제품을 개발하는 공동연구·컨소시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내의 공동연구나 기술개발치고 성공하는 예가 없다.
각 참여기업은 자기가 강한 기술은 감추고 남의 기술을 빼가려고만 해 결국 절름발이 결과를 내고 만다.
대만이나 일본 컨소시엄의 자세를 배워야 하겠다. 하드웨어·소프트웨어·시스템·응용산업이 골고루 강해야 살아남는 컴퓨터 시장에서 어느 한 회사가 모두를 지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류의식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안돼」 따위의 자조 분위기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에서는 일등만 살아남고 이등은 없다. 처음부터 목표를 3, 4등에 두면 1백% 실패할 따름이다.
세계에서 4, 5등 하는 컴퓨터산업을 우리나라에 갖추려면 누군가 위의 모델을 적어도 컴퓨터산업의 한 분야에서나마 세워주어야 한다. 이는 지금까지 반복해온 기업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 확실한 자체기술에 기초하고 세계적으로 가격과 성능경쟁력 있는 제품을 진정한 산·학 협동연구로 만들 수 있을 때 컴퓨터 공학도들에게 가치있는 미래의 비전을 자신있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최양희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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