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황과 문제점
전자거래법, 전자서명법이 입법예고됐다. 이번 입법예고는 기존 상거래의 틀을 바꿔버릴 전자상거래(EC) 환경에 적극 대처하고 관련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겠다는 정부의 의지라는 평가다.
하지만 국가안전기획부의 보안지침과 규제관행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같은 법률이 민간산업의 육성에 도움이 될지는 회의적이다. 그동안 안기부의 보안지침은 정보보호분야를 규제대상으로 엄격히 제한해와 산업육성은 물론 국가정보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을 줄곧 받아왔다. 안기부도 정보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대국민 「정보서비스기관」으로 거듭난다는 취지에서 명칭도 「국가정보원」으로 바꾸기로 한 마당에 더더욱 그렇다.
본지에서는 안기부 보안지침과 관련한 각 분야 정보보호의 문제점과 이의 개선방향, 그리고 관계기관 및 단체들의 바람직한 역할 등을 5회에 걸쳐 알아본다.
<편집자>
정보보호 전문 벤처기업을 표방하며 야심차게 출발해 최근 암호제품까지 개발한 A기업. 아직은 맹아기적 수준에 있는 정보보호분야에서 이 업체는 가장 핵심적인 기술분야인 암호제품에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개발을 완료했던 시점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에 부딪혔다.
안기부가 『암호 알고리듬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니 아무에게나 팔지 말라』며 정중한 권고(?)를 해왔고 이 업체는 장사를 하기 위해 제품개발에 필요했던 소스코드 등의 공개를 요구받았다.
알고 보니 공공기관에 공급되는 모든 보안제품은 사실상 안기부의 승인을 얻어야 했고 이를 위해 소스코드 등의 제공은 기본이었다. 또 공공기관에 납품한 물건은 민간분야에 판매할 수도 없었다. 특히 공공기관용 암호 알고리듬은 안기부만이 독점 제공하는 분야였다.
A기업은 국가안보도 중요하지만 그동안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모든 것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국내에서 공공기관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은 알지만 해외진출을 노리는 이 업체는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의 대안으로 전자상거래(EC), 전자금융 등의 민간시장을 공략목표로 설정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국내에서는 금융권도 「정부가 일정지분을 출자해 관리감독권을 갖는 공공기관」이라는 암초에 부딪혔다. 제품을 개발해놓고도 팔 곳이 없어 자금압박에 허덕이던 이 업체는 결국 외국회사에 넘어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A사의 사례가 바로 제도적 걸림돌에 부딪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국내 정보보호산업의 현주소다. 국내업계의 기술력도 확보돼 있고 EC나 금융 등의 분야에서 수요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보안시장의 형성을 실제로 가로막는 안기부의 「보안지침」이 이 모든 것의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안기부의 지침이 미치는 파장은 현재 정보보호산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해외에서는 새로운 EC환경에서 대두할 관세, 소비자보호 문제 등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나 국내에서는 EC에 적용되는 암호 알고리듬 문제로 시스템 도입은 물론 개발도 제한받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회원제로 운영되는 사이버 쇼핑몰이 EC의 전부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나마도 보안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금융과 연계한 직접적인 소비자 혜택이 턱없이 미흡한 실정이다.
또 안기부의 보안지침을 단순 적용, 일선 금융권의 전산보안대책 수립 및 전자금융수단 도입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서 재정경제부도 비판의 화살을 면하기 어렵다.
재경부는 현재 전산보안만을 전담하는 하나의 과(課)조차 부재한 상황에서 『일선 금융권의 전산운용 능력이 일천하므로 모든 보안제품은 정부가 보증하는 제품만 써야 한다』며 규제를 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금융권은 갈수록 급증하는 전자금융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각종 전자금융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나 「공공기관」으로 분류된 원죄(?) 탓에 마땅한 보안제품을 갖출 수도 없는 실정이다.
금융권으로서는 사고방지를 위해 도입하는 보안제품도 일일이 재경부, 안기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여기에 적용되는 암호 알고리듬도 외산은 안된다고 하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수십년에 걸쳐 세계적으로 검증된 외산 알고리듬이 안된다면 믿을 수 있는 국산 암호 알고리듬과 제품을 달라』고 해도 안기부와 재경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김경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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