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KIST전산실의 발족-전산실장 취임 (1)
66년 2월 설립된 구(舊)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초대 소장으로는 당시 가장 유망한 과학자로 손꼽히던 원자력연구소장 최형섭(崔亨燮, 현 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이 임명됐다. 최형섭은 경제개발의 요체인 과학기술의 확보를 지상과제로 여겼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의해 전격 발탁된 인물이었다.
20년생인 최형섭은 일본 와세다대학교를 졸업(채광야금학)하고 미국 노트르담대학교에서 석사(물리야금학),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박사(화학야금학) 학위를 잇따라 취득했으며 당시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가운데 하나였고 제철, 핵연료재처리 등 야금(冶金) 분야의 국내 최고 권위자였다. 62년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가기 전 최형섭은 상공부 광무국장(鑛務局長)으로 특채된 적도 있었다. 이런 경력으로 그는 KIST 초대 소장에서 곧바로 과기처 장관으로 영전된 다음 역대 최장수(71∼78년)장관 재임기록을 세우면서 70년대 후반에는 박 대통령이 극비리에 추진했던 이른바 「화학처리대체사업」 즉 핵무기개발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기도 했었다.
성기수가 67년 9월 14일 발족된 KIST전산실의 초대 실장이 된 것은 바로 최형섭의 발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산실장으로 발탁되기 전 그러니까 67년 2월부터 7월까지 6개월 동안 성기수는 KIST의 임시연구원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도 물론 공군사관학교 교수부에 적을 둔 현역 공군대위라는 신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서울대 등에 출강도 계속하던 때였다.
KIST 임시연구원으로서 성기수가 한 일은 한국의 전산수요를 예측하는 조사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KIST의 설립과 초기 조직체계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의 바텔(Battelle)기념연구소가 직접 실시했던 17개 분야 산업실태조사 연구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버스시에 소재하고 있던 바텔기념연구소는 29년에 설립된 미국 최대규모 민간 종합연구소 가운데 하나로서 제약, 농예학(農藝學), 에너지, 운송, 기초과학, 환경 등에 대한 연구용역은 물론 세계 30여국과 계약을 맺고 여러 기술용역 사업을 하던 곳이었다. 바텔기념연구소는 66년 미국 정부를 대신한 국제개발처(AID)와 계약을 맺고 KIST발족에 필요한 모든 기초작업을 수행했고 발족 후에는 KIST와 직접 계약을 맺은 상태에서 연구용역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바텔기념연구소 측은 미국 본사에서 23명의 연구원을 불러들인 다음 한국의 산업계, 학계, 정부기관에서 선발한 57명의 전문가들과 함께 공동조사단을 구성하고 66년 11월부터 67년 말까지 1년여 동안 17개 분야에 대한 산업실태조사에 나섰다. 17개 분야는 재료, 기계, 전자, 화학 등 중점 5개 분야 외에 기술정보, 전자계산(컴퓨터), 공업경제, 재료시험, 화학분석 등이 포함됐다. 이들 분야는 한국정부가 1.2, 3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서 중점 육성사업으로 채택한 철강, 제강, 전자, 기계, 석유화학공업 등 자본집약적이면서 동시에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공업화 기반과 연관성이 깊은 것들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성기수는 바텔연구소 23명의 연구원 가운데 컴퓨터담당이었던 택슨(Taxon, Mike), 육사교관이었던 김덕현(金德賢, 재미) 등과 셋이서 전자계산 분야 조사를 담당했다.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72∼76년)이 완료되는 시점까지의 중장기 컴퓨터 수요조사가 그 주된 내용이었다.
컴퓨터 수요라는 것은 곧 전산화에 대한 수요였다. 전국의 6백여 기업체와 관련 정부기관, 대학 등을 조사해 보니 향후 상당한 전산화 수요가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연구결과를 토대로 세 사람은 다시 국책연구소로서 KIST가 이같은 전산화 수요에 과연 어떻게 대비해야 되는가를 연구하는 작업에 나섰다. 즉 KIST가 추진해야 할 연구과제, 연구책임자의 유치, 적정 연구장비의 선정, 필요경비 등 구체적인 연구실시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세 사람은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를 내놨다. KIST가 상당한 전산화 수요에 대비하기 가장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방안은 컴퓨터를 직접 운용할 수 있는 전자계산실의 설립이라는 결론이었다. 이 보고서는 곧바로 한국에 파견 나와 있던 바텔기념연구소의 컴퓨터기술고문 에반스(Evans, Donald)를 통해 KIST 소장 최형섭에게 전해졌다. 에반스는 성기수와 김덕현을 임시연구원으로 추천해 준 인물이기도 했다.
최형섭은 바텔기념연구소의 건의를 그대로 수용했고 KIST는 보고서대로 67년 9월 14일 문건상으로나마 전산실을 발족시켰다. 인력과 장비 어느 것 하나 갖추지 못한 채 이름만 내 건 상태였다. 새로 영입될 전산실장이 전산실의 인력확보와 장비 도입 그리고 초기 조직정비 등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기로 돼 있었다. 문제는 초대 전산실장을 누구에게 맡기느냐는 것이었다.
최형섭의 입장에서도 바텔기념연구소 측의 연구보고서가 아니더라도 컴퓨터의 이용기술에 대한 연구가 매우 중요한 분야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런 만큼 초대 KIST 전산실장을 영입하는 일은 최형섭에게 여간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최형섭은 전산실장 자격으로서 첫째 컴퓨터에 대해 해박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고, 둘째 수학적 사고에 능하며, 셋째 미국 등 선진국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자 등의 조건을 내걸고 각계에 마땅한 인물의 추천을 의뢰했다. 적합한 인물이 추천돼 올 경우 최형섭은 66년 조인된 KIST설립에 관한 한미협정서에 따라 유치과학자로서 최고의 대우를 해 줄 계획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입 대상은 전산수요조사를 담당한 성기수와 김덕현 두 사람으로 좁혀졌다. 두 사람은 물론 최형섭이 내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 다른 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모두 유학파이면서 수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물리계통 분야 전공자라는 점, 그러면서도 당시 국내에 몇 안되던 컴퓨터 전문가였다는 점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현역 장교이면서 각각 공군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는 교수부 소속 교관 신분이라는 점도 같았다. 김덕현은 임관한 지 얼마 안되던 육군 중위였고 58년 임관한 성기수는 10년째 복무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초대 KIST 전산실장은 성기수로 낙착을 봤는데 그 조건은 다름 아닌 군복무기간이었다. 전산실의 설치는 KIST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에서 그 책임자는 일단 정식 임직원으로서 풀타임 근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두 사람의 조건이 서로 달랐던 것은 잔여 군복무기간이었다. 김덕현의 경우 제대예정일이 2년 이상 남아 있었던 것에 반해 성기수는 예정일이 68년 8월로서 잔여 복무 기간이 1년 미만이었다. 더욱이 성기수는 군 당국으로부터도 KIST에서 제대 예정일까지 풀타임 근무를 할 수 있다는 내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군 당국의 내락은 54년 공군 창설 당시 초대 공군참모총장과 그 직후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던 김정렬(金貞烈, 92년 작고)의 역할이 컸다. 67년 당시 막 개원된 제7대 국회에서 공화당(共和黨) 전국구의원 배지를 달고 있던 김정렬은 군 후배들로부터 젊은 과학자 성기수 대위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최형섭에게 추천했다.
성기수가 65년부터 2년여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한국경제개발협회(KDA) 회장 송인상(宋仁相, 현 한국능률협회그룹회장)도 그를 추천했다. 송인상은 KDA에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67∼71년) 에 덧붙이게 될 15개년(67∼81년) 중장기경제개발계획을 계량(計量)해낸 성기수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갖고 있던 터였다. 인사권자인 최형섭도 바텔기념연구소 고문 에반스로부터도 성기수의 능력에 대해 듣고 있던 중이었다.
성기수는 이때 하버드대 유학 당시 스승이었던 브라이슨(Bryson, Arthur)교수의 추천으로 캐나다의 웨스턴 온타리오(Western Ontario)대 수학과 교수로 가기로 하고 가족들과 함께 여권수속을 밟던 중이었다. 67년 12월 최형섭의 전화를 받고 성기수는 즉시 캐나다 행을 포기하기로 했다. 교수직에 크게 애착이 가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국책연구소에서 조국이 필요로 하는 컴퓨터응용기술을 직접 개발하고 보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말 그대로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었다.
63년 봄 미국 유학시절 하버드대학교 전자계산소에서 난생 처음 IBM 7090을 대하고는 흥분으로 가슴 뛰던 기억이 불과 엇그제 일 같았다. KDA에서 중장기경제개발계획을 계량하면서 경제개발보다는 우선 단 한대의 컴퓨터라도 국내에 들여오는 것이 더 급선무라고 결론을 내렸던 그였다. 그 비슷한 시기에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한국기술개발공사에서도 자신이 제안했던 대로 IBM 1130 컴퓨터가 도입됐더라면 그의 KIST행은 아예 없었을 것이었다.
한국에도 마침내 컴퓨터의 시대가 오리라는 것과 자신이 그 주역이 되리라는 꿈이 이제 막 현실로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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