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실리콘밸리] 황금의 땅에 "태극물결" 넘친다

샌프란시스코만(San Francisco Bay)에 태양이 떠오르면 황금의 계곡, 실리콘밸리에도 아침이 시작된다. 먼 옛날부터 이 지역은 「풍요의 뿔(Horn of Plenty)」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제우스신에게 젖을 먹였다는 신화 속의 염소가 유난히 큰 뿔을 가졌다고 해서 다산(多産)을 상징하게 된 이 말은 실리콘밸리의 풍요로움을 연상시킨다.

1930년대만 해도 캘리포니아 최대의 과수단지였던 이곳에는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며 살구나무가 봄이면 분홍이 섞인 흰색 꽃잎을 바람에 날리며 다가올 또 한해의 풍년을 예고했다.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반도체 칩이 버찌나 살구보다 흔해지면서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을 얻게 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여기에선 반도체 회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부가가치가 훨씬 높은 소프트웨어와 통신업체들에 밀려 인텔을 제외한 대부분의 하드웨어 제조업체들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알래스카 한랭기류의 영향으로 이곳의 6월은 아침이면 가을처럼 선선하다. 일교차가 심해 한낮엔 27도 안팎으로 올라가지만 습도가 워낙 낮아 이곳의 엔지니어들에겐 더없이 쾌적한 자연환경이다. 하지만 올해는 엘리뇨 탓인지 마마스 앤드 파파스가 1년 내내 구름이 끼지 않는 꿈의 낙원이라고 노래했던 캘리포니아에도 비가 뿌리는 날이 간혹 있다.

싱그러운 나무숲 사이로 눈에 들어오는 파스텔톤의 건물들은 울타리도 없이 넓은 잔디밭 한구석에 회사이름을 새겨넣은 표지판만 세워 놓아 이곳이 첨단산업의 메카인지 한가로운 휴양지인지 혼동스러울 정도다.

바로 이곳 기회의 땅, 실리콘밸리로 우리 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다. 우물안 국내 경쟁에서 벗어나 세계를 무대로 희망찬 나래를 펴기 위해 우리 젊은이들이 이곳에 원대한 꿈을 안고 자그마한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실리콘밸리에는 3만명 이상의 한인이 살고 있다. 하이테크산업에 종사하지 않는 현지교포라든가 대기업에서 파견된 지사 직원들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모험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낯선 땅으로 건너온 사람은 1백명을 조금 웃도는 정도다. 실리콘밸리에 법인 또는 지사 형태로 진출한 정보통신 관련 벤처업체 수는 다 합쳐야 30∼40개사에 불과하다.

이 중 창업보육조직에 입주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터전을 마련한 업체로는 보광미디어가 설립한 「아라리온 테크놀로지」, 핸디소프트가 세운 「핸디소프트USA」, 서두로직의 「마이캐드」, 두인전자의 「E4」, 다우기술, 트라이콤 등 10여개사. 이들 대부분은 실리콘밸리로의 한국 업체 진출 붐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현지적응을 마치고 활발하게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E4는 「쿨DVD」를 미국 마이크론사에 납품한 데 이어 애플컴퓨터의 DVD 독점공급업체로 선정됐고, 아라리온 테크놀로지는 초고속 반도체 칩 세트 「울티마」의 미국판매를 준비중이다. 또한 소싱을 주로 해온 다우기술과 트라이콤은 국산 소프트웨어의 역수출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새너제이 시가 운영하는 국제창업보육센터인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인큐베이터(IBI)」에는 마리텔레콤, 청조정보통신, 만상 등 3개 한국업체가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중 마리텔레콤은 웹 기반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아크메이지」의 수출과 3D 온라인 네트워크 게임의 차세대 플랫폼 개발에 들어갔다.

또 지난 4월 24일에는 국내 유망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미국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기 위해 「해외소프트웨어지원센터(KBI:Korea Software Incubator, 소장 박승진)가 새너제이 시에 문을 열었다. KBI에는 건잠머리컴퓨터, 장미디어인터렉티브, 큰사람정보통신, 골드뱅크커뮤니케이션, 디지털캐스트, 디지털퓨전, 미리내소프트, 아블렉스, 제이슨테크, 넥스텔 등 유망 벤처업체 10개사가 입주를 마쳤다.

이곳은 2백60평의 시설에 창업지원실 및 비즈니스 지원실을 갖추고 있으며 입주업체들에 초기 현지화 정착을 위한 각종 인프라와 마케팅, 경영컨설팅을 제공해준다. 한국과 연결된 초고속 통신회선이 마련돼 있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각종 사업을 동시에 진행시킬 수 있는데 이들 업체가 부담하는 입주비용이 월 1백∼3백달러에 불과해 국내 업체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또한 지난해 11월 출범한 재미한국인기업가협회(KASE, 소장 이계복)도 최근 미국 정부에 비영리단체로 정식 등록하면서 활동폭을 넓히고 있으며, 12일에는 한국벤처기업협회(KOVA)의 벤처기업 대미 투자단이 현지를 방문해 실리콘밸리 해외지부(지부장 전하진) 결성식을 갖는다. 두인전자, 핸디소프트, 새롬기술 등 20여개사를 회원으로 확보하고 앞으로 코리아 벤처 펀드를 결성해 투자유치에 나설 예정이다.

인터넷 전문업체인 웹인터내셔널을 비롯해 컴퓨터폰트 개발업체인 윤디자인연구소, 게임소프트 업체인 NC소프트, 데이터베이스 관리업체인 (주)채널1, 동영상 압축 및 환원기술 관련 보드업체인 다림시스템, 영상회의시스템 전문업체인 나다기연 등이 미국 진출을 준비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한국 벤처업체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물론 이들 중 몇 개 업체나 척박한 땅 실리콘밸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해외지원센터의 한국 업체들은 비즈니스 플랜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서둘러 입주해 정상가동에는 앞으로 3∼4개월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현지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은 『인도와 대만이 없었다면 실리콘밸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다가도 『한국 출신으로는 눈독을 들일 만한 벤처업체가 별로 없다』며 대부분 냉담한 반응을 보여 과연 이 중에 나스닥 상장에 성공하는 업체가 나올 수 있을 것인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곳 실리콘밸리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앵글로색슨계 개신교 백인)가 상류층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미국 속의 이색지대지만 한국 출신의 거물급 인사들도 늘어나고 있다. 미국 4백대 부자로 손꼽히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상공회의소장을 맡고 있는 텔레비디오의 황규빈 회장, 지난해 매출규모 40위를 기록한 다이아몬드사의 이종문 회장, 통신장비 제조업체 자일랜사의 상장으로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스티브 김이 모두 실리콘밸리에서 신생업체로 출발했다.

비록 이들의 성공담이 대부분의 한인들에게는 꿈같은 얘기일지라도 누구에게나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있어서 활기가 넘치는 곳이 바로 실리콘밸리다.

<실리콘밸리=이선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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