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다국적기업] 기고.. 김기홍 산업연구원 수석연구원

작년 12월 IMF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기 시작한 이후 우리나라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자금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외환위기 혹은 그 이면에 놓여 있는 외채위기를 하루 빨리 극복하는 것이다.

외채 상환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수출을 확대해 가용외환을 실질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한 해에 2백억 달러를 상회하는 무역수지 흑자, 혹은 경상수지 흑자를 실현하더라도 외채의 원리금 상환(현재 총외채는 1천5백억 달러, 1년 이자 1백50억 달러)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는 우리 경제의 재건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되고 있다.

더 많은 외국인 투자를 국내에 유치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건이 구비돼야 한다. 첫째, 외국인 투자를 저해하는 국내 제도와 관행이 제거돼야 하고(국내의 제도적 요인) 둘째, 외국인투자가가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국제적 신인도가 있어야 하며(국제신인도) 셋째, 투자로 인한 국내 영업활동을 방해하거나 저해하는 비제도적 요인(국민의 정서적 수용도)이 없거나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가운데 국제신인도 부분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조정할 수 없는 분야다. 하지만 국내의 제도적 요인과 국민의 외국인투자에 대한 수용도는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분야다. 나아가 국내의 제도적 요인과 비제도적 요인이 개선되면 이는 국제신인도를 제고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런 만큼 국내 요인들을 외국인 투자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작업이 긴요하다.

작년 12월 이후 정부는 외국인 투자 유치를 저해하는 각종 법과 제도를 정비하거나 보완해와 이제 제도적 개선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정부의 주요 조치는 △외국인 투자가능 업종 제한 완화 △외국인 토지취득 자유화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원스톱서비스 체계 구축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기능 확대 △조세감면 확대 △재정지원 확대 △공단부지 가격 인하 △외국투자조사단 유치활동 본격화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조치들이 완벽하게 실현된다면 외국인 투자에 관한 국내 제도는 거의 이상적인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한 한 새로운 아이디어나 조직을 신설하기보다는 현재 계획되거나 시행되고 있는 조치들을 효율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 더 덧붙일 것이 있다면 외국기업이 국내기업을 인수할 때 이에 따르는 노조와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최근 노조의 반발 때문에 외국인 투자 유치가 무산될 뻔한 경험을 고려할 때 이에 대한 기준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조건은 외국인 투자에 대한 국내의 문화적, 정서적 태도다. 외국인 투자는 국내 산업활동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 의해 생산된 제품이 우리 국민에 의해 수용되지 않는다면 이는 실질적으로 외국인 투자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다시말해 아무리 국내의 제도적 요건이 완비돼 있다 해도 외국인들의 생산활동과 상품을 백안시하는 풍토가 있다면 이는 사실상 외국인 투자 유치에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는 외환위기 전까지 외국인 투자의 국내 유치는 우리 경제를 외국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간주해 달갑지 않게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최근 이러한 우리의 문화적 풍토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두 가지 방향에서 흘러나오고 있는데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로 보인다. 그것은 소위 국산품 논쟁과 합리적 소비논쟁이다. 두 문제 모두 외국인 투자, 나아가서는 외국상품 일반에 대한 시각의 설정과 깊이 관여돼 있다.

국산품 논쟁의 핵심은 외국인 소유 기업이 한국에서 만든 물건을 국산품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소비절약, 국산품 애용운동과 결부돼 외국상품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질 기미를 보였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경제의 국제화가 진행될수록 국산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외국인이 소유한 기업이더라도 국내에서 국내의 노동력에 의해 국내 자원을 이용해 생산된다면 국산품으로 간주돼도 무방하다.

그런 점에서 상표가 한글이냐 아니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상품의 생산으로 한국이 정말 실질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아자동차를 포드나 GM이 인수해 한국에서 세피아를 만들어 팔더라도 그것이 국산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인 투자를 이유로 회사 성격이 바뀐다 하더라도 기아자동차는 계속해 한국에서 한국 노동자를 고용해 한국의 부품을 이용해 생산, 한국 경제에는 분명히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기업이 누구의 소유인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경향은 경제의 국제화가 심화될수록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산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우리의 외국인 투자 유치를 저해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국산품 개념에 근거한 국산품 애용운동은 자연히 외국상품에 대한 불매운동 혹은 수입물품 배격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외국의 경계심만 유발하게 된다. 그 결과는 통상마찰의 한 요인으로 작용해 우리의 수출확대마저 위협할 수 있다.

외환위기가 초기일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근검절약이 강조됐다. 이는 곧 국산품 애용과 외국상품 불매운동으로 연결돼 그 본래의 취지를 흐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의 근본 동기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외국상품 불매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한국에 투자하려는 외국인투자가의 발목을 잡는 역기능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분별한 근검절약이 아니라 자기 소득수준에 근거한 합리적인 소비다. 품질과 가격이 적당하다면 외국상품이라고 구매해선 안될 이유가 없으며 국산품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입하는 행위 또한 비합리적 소비행위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현재의 우리 생활에 깊숙이 침투돼 있는 사치성 외국소비재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사실 소비재의 과다한 수입은 자제돼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국산논쟁을 통한 외국상품 배척운동을 통해서라면 그것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국민들은 외국인 투자 유치가 우리 경제의 재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식, 외국인 투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기업의 국적여부와 관계없이 한국에서 한국사람을 고용해 물건을 만든다면 그것을 국산으로 간주하는 좀 더 개방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 상품의 브랜드만으로 상품의 국산 유무를 판단하는 미숙한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민간의 인식전환을 촉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국민의 합리적 소비를 촉진한다는 차원에서 외국인 투자의 실태와 이들이 만드는 상품에 대한 정보를 민간단체에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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