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다국적기업] "철새" 아닌 "텃새기업"으로 변신

다국적 기업들은 시대에 따라 그 모습과 역할이 달라져 왔다.

70∼80년대만 하더라도 다국적 기업들은 주로 후진국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현지공장을 설립하거나 자국에서 만든 제품을 팔기 위한 현지법인 설립 등의 형태로 타국에 진출했다. 이때 다국적 기업들은 그 나라의 기업이라기보다는 외국기업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업경영에서부터 영업에 이르기까지 핵심역할을 모두 외국인들이 맡아했으며 기업문화도 현지와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다국적 기업들은 「현지화」라는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됐다. 단순한 인건비 절감차원에서 벗어나 현지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그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하며 발전해나간다는 것이다. 사장도 현지인을 채용하고 영업책임자도 현지인이 맡는가 하면 기업문화도 현지화시켜 나갔다. 외국기업들은 과거의 단물만 빨아먹고 떠나는 「철새떼」에서 그 나라에 뿌리내려 동고동락하는 「한식구」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또 그 나라의 주요기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함으로써 민족기업에 침투해들어가는 사례도 늘고 있다.

최근 다국적 기업들의 진출은 미국과 서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인수합병(M&A)투자(Cross-border M&A) 형태로 변해가고 있다. 96년 기준으로 국제적 M&A투자의 규모는 외국인기업 간접투자(Portfolio Investment)를 포함할 경우 2천7백50억달러며 이 중 47%에 해당하는 1천6백30억달러가 직접투자됐다. 80년대만 해도 M&A투자는 대부분 선진국간에 이뤄졌으나 최근에는 개도국에 있어서도 M&A투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와 함께 국제적 기업간 제휴(Cross-border Inter-firm Agreements)도 증가하고 있다. 90년의 경우 1천7백60건에 불과했던 기업간 제휴는 95년에 4천6백건으로 크게 늘어나는 등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M&A투자 및 기업간 제휴의 증가에 따라 다국적 기업은 기술이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글로벌화시대에서 다국적 기업은 이제 더 이상 「외국기업」이라고 할 수 없다. 개방화가 피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기업의 국적은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 모든 기업들이 앞다퉈 글로벌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등 급변하는 무역환경에 대응하고 신시장 개척을 통해 살아남으려는 기업들의 자구노력의 일환이다. 핵심 전략상품을 개발하기 위한 기술을 확보하거나 물류서비스 및 판매망의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 등을 통해 경쟁사에 비해 비교우위를 점하기 위해 특정업체와의 전략적 제휴는 물론 유망기업의 인수, 자본합작, 해외투자 등에 나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경이 없는 21세기의 글로벌환경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이같은 다국적 기업의 세계적 제휴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주고받는(Give And Take) 원리가 철저하게 적용되고 국경을 넘어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는 현 상황에서 전략적 제휴의 대상기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경쟁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것은 곧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파트너 기업이 갖지 못한 독자적인 기술 및 노하우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생산부문의 무분별한 다각화 전략보다는 특정산업에 집중하고, 성장성보다는 수익성을 중시하는 전략으로 수정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글로벌시대에서 기업들의 생존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급격히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국제규범,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다. 자유화, 세계화가 세로운 국제경제질서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현 상황에서 기업이 진정으로 글로벌하기 위해서는 외형의 글로벌화뿐 아니라 기업경영 자체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용되면서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란 단일화한 세계시장에서 통용되는 국경을 초월한 약속이나 규범으로 글로벌시대에서 국제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준수해야만 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경영의 투명성은 물론 금융시장 개방, 환경무역 규제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현재 세계의 모든 기업들은 모든 경영의 초점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경쟁적으로 개혁에 나서고 있어 이같은 흐름에 뒤처지는 국가와 기업은 대외적으로 통상압력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국제거래상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유럽의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인 ABB의 경우 전세계 1백40개국에 거점을 두고 20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지만 본사 스태프는 1백50명이며 그 중에서 임원은 8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ABB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같은 조직슬림화와 함께 경영의 투명성, 주주역할의 강화, 경영간부 급여의 업적제 등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규범을 도입해 시행했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최근 미국기업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기본방향도 주주들의 경영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기 위해 이사회, 감사회, 주주대표 소송을 활성화하고 M&A시장 및 경영자시장을 통한 외부견제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 큰 흐름이 되고 있다. 또 기업활동의 국제화나 국간 자본이동의 장애요인으로 지적돼온 서로 다른 국가간 회계처리 기준을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며 기업활동의 국제화가 확산되고 국제거래가 늘어나면서 연결재무제표 작성 등 새로운 의무가 필수적으로 부과되고 있기도 하다.

지구환경문제의 대두와 이에 대한 규제강화를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및 WTO를 중심으로 한 환경라운드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도 기업들에는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될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밖에 OECD가 지난 76년 회원국내에서 영업활동을 하는 다국적 기업의 행동기준에 대한 지침으로 뇌물 및 부패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을 마련한 이래 지난해 5월말 기업의 해외 뇌물공여방지를 위한 국제협약을 추진키로 합의하는 등 부패라운드(Anti-Corruption Round)도 새로운 국제규범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하고 있는 이끌어가고 있는 미국기업들은 이같은 기본원칙 아래 지금까지 단기이익 위주의 경영에서 벗어나 전략적 경영을 중시하고 있으며 첨단 리스크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또 단기투자와 배당을 중시하던 경영방식에서 배당억제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기존 대량생산방식에 의한 물량공세에서 고객만족, 생산성, 이노베이션에 바탕을 둔 사람중심의 지식경영으로 전환하고 있다.

유럽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유럽기업들은 협소한 시장규모와 기업제도의 부분적인 비효율성을 절감하고 미국식 경쟁원리와 자기책임 원칙의 도입을 강화하고 있다. 또 이미 진전돼 있는 글로벌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고 구조조정과 M&A를 통해 효율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가장 폐쇄적인 일본기업들도 기존 규제중심의 발전전략, 국내 완결형 생산 및 판매, 계열거래형 제조업 위주의 경제가 한계에 직면하면서 일본형 경제시스템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고도성장을 이끌어왔던 정부와 기업간 협력, 기업내 합의적 의사결정방식 등이 소프트사회에서는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된데다 특히 정보통신이나 소프트웨어 등 지식산업을 전개하는 데 요구되는 창조적 제도와 풍토가 취약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기업들도 글로벌 스탠더드가 21세기 생존의 관건이 될 것으로 판단해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 시행하고 있다. 도시바가 개방화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화된 도시바, 열린 도시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으며 마쓰시타도 과감한 혁신과 글로벌 스탠더드에 바탕을 둔 경영을 추진하기 위해 「발전 2000년 계획」을 출범시켰다.

이같은 국제적인 조류와는 달리 국내 기업환경은 일부 대주주와 경영자로 권한이 집중되고 주주 및 채권자의 감시역할이 미흡하며 정보공시와 내외부 감사에 의한 경영투명성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또 자본시장 개방으로 기업들의 해외자금 조달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회계 기준에 따르지 못하고 있어 외자유치에 새로운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밖에 선진국에 비해 빈약한 환경의식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관련기술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어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기업경영 활동의 위축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여기에 국내기업들의 비정상적 부패행태가 국제적으로 상당히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규범화 여부와 상관없이 외국기업들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제도와 경영시스템을 세계에 통용되는 방식인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되도록 바꾸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시대적인 요청이 되고 있다. 80년대 말 이후 국내기업들의 해외진출이 크게 늘어났고 94년 말에는 세계화라는 글로벌정책을 표방했지만 이것은 주로 국내기업들의 해외진출과 국내시장 개방에 초점을 맞춘 데 불과하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국내에서만 통하는 우물안 개구리식 발상으로는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생존할 수 없다. 국내기업들도 진정한 글로벌화를 위해서는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대형거래에 참여할 수 있는 기술적, 자본적인 능력을 확보하고 기업제도와 관행을 혁신해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부문별 글로벌 스탠더드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경영역량을 배양하고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표준을 형성해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만이 기업들이 글로벌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양승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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