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체제는 산업혁명 이후 계속된 민족경제시대로부터 세계경제시대로 바뀌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모든 나라들이 자기 민족의 경제적 이익도 지키지만 남하고도 협력하는 쌍방통행시대입니다.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며 국제적 협력을 많이 얻는 나라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내 나라에 오면 내 돈이 되는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1월 취임 전 국민과 TV대화에서 한 대학생이 외국자본의 유치로 자칫 경제식민지화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섞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다국적 기업도 우리기업이나 다를 바 없다」는 최고통치자의 시각을 보여준 대목이다.
세계는 지금 다국적기업이 지배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전 세계에는 4만여개의 다국적기업이 있으며 이들의 연간 매출은 수백억달러에서 수천억달러에 이른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최근 발표한 「97세계투자보고서」은 대기업들의 국경을 초월한 투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전세계 초국적(Transnational) 기업의 해외 총 투자규모가 지난해말 기준으로 1조4천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세계 생산량의 30%, 세계 교역량의 70%, 기술이전의 80%를 다국적기업이 담당한다는 통계는 다국적 기업의 위상을 실감케 하고 있다. 이제는 한 국가의 국력을 판단할 때 다국적 기업의 보유수와 규모 등을 그 지표로 삼고 있을 정도다.
다국적 기업이란 해외 여러 국가에 직접 투자를 증가시켜 총자산, 총이익, 총종업원 수 등의 규모가 국내보다 해외부문이 더 큰 기업을 뜻한다. 따라서 다국적 기업은 생산과 판매를 여러 국가에 분산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도 다국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최근 다국적 기업이라는 용어 대신 초국적 기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도 이제는 기업활동에는 국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자국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금융위기라는 총체적 경제 난국을 맞아 다국적 기업들이 우리 경제위기 돌파의 동반자로 부각되고 우리 경제기반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축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 동안 국민들로 부터 관심밖에 있거나 착취 또는 과실송금의 주체로서 비판의 대상이던 다국적기업들에 대한 관심이 전에 없이 집중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이들의 국내 생산이나 수출활동이 최근 언론매체를 통해 소상하게 전해지면서 다국적기업들의 국내 투자규모와 신규사업 계획이 국민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일각에서는 경제회생의 돌파구를 외국인 투자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외국기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우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데는 우리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라는 초유의 경제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IMF구제금융 이후 빚어지는 심각한 자금난으로 거대 순수 토종기업들이 맥없이 쓰러지고 있는데 반해 다국적기업들은 본사로 부터 해외자금을 끌어들여 축적한 자체 신인도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생산활동을 벌이면서 수출에서도 상당한 개가를 올리고 있다. 또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일자리와 임금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우리의 경제위기는 국가신인도 추락에 의한 일시적인 금융위기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80년대 후반부터 가속화하기 시작한 세계경제시대라는 새로운 조류에 우리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경제시대를 어떻게 대응하는 게 바람직한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국적 기업을 과감하게 유치해 이들이 국내에서 생산이나 영업활동을 자유롭게 적극 지원하는 길 밖에 없다. 다국적기업이야말로 세계경제시대를 이끌어가는 첨병이기 때문이다. 또 단기적으로는 외화유치 효과를 높일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우리 경제를 국제화 구조로 바꿀 수 있다.
물론 다국적기업의 적극적 유치가 자칫 「외국기업에의 국내산업 지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일반인의 우려는 있지만 이 문제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결론없이 논란만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시대로 이행하는 추세에 대응 논리로 적합지 않다는 지적마저 제기되고 있다.
세계경제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외국기업 유치를 열을 올리고 있다. 더욱이 WTO나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등과 같은 국제기구들이 중심이 돼 각국의 무역, 투자장벽을 완화시켜 나가면서 각국은 투자개방 정책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등 종전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기업들의 외국투자도 공격적인 기업 인수합병(M&A)방식을 통한 직접투자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투자가 본격화한 것은 수출기조의 경제개발 정책을 토대로 정부가 실질적인 국가재건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지난 62년부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외국자본과 기술은 초기 우리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고, 이후 수년동안 지속된 외국인 투자는 우리 경제기반을 다지는데 큰 기여를 해왔다. 진출분야도 제조업에서부터 서비스업에 이르기까지 전 산업 분야였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스스로 자본을 축적, 자력으로 운신하면서 부터 외국인 투자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우리 경제규모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규모로 위축돼 갔다.
산업연구원이 지난 2월 발표한 「5백대 다국적기업의 국내진출 현황」자료에 따르면 이들 다국적기업중 5분의 1정도인 1백22개사만 국내에 진출하고 투자액도 27억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업체 당 투자금액이 평균 1천9백만 달러에 불과하다. 다국적 기업들은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적지라면 세계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투자하는 게 생리인 점을 감안하면 세계적인 기업들에게 있어 우리나라에 대한 투자가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우코닝사가 우리나라에 10억 달러의 투자를 추진하다 동남아로 선회해버린 사례는 외국기업들의 투자에 대한 우리나라의 제도와 관행에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정부가 뒤늦게나마 이를 간파, 최근 「외국인 투자촉진법」제정을 서두르는 등 제도 정비작업에 나서고 있다. 특히 「외국인투자지원센터」까지 개설하는 외국인 투자환경을 혁신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외국기업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이들은 현재도 한국이 일본 못지 않게 외국자본에 대해 배타적이며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제노포비아)이 매우 강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말 IMF관리체제로 들어가면서 전국적으로 국산품애용운동이 일어났고 외제품 배격조짐마저 빚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 1일 근로자의 날 발생한 과격한 시위는 노동시장이 여전히 불안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보여줌으로 써 외국자본의 국내 유입을 멈칫거리게 했다. 또 우리나라가 해외에 내다판 채권 값이 급락하는 등 대외신인도 하락이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어설픈 애국행위가 나라를 망치고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외국상품 불매운동 등과 같은 소아병적 행동은 세계화 추세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지난해 내놓은 연례보고서에서 「수입품 불매운동이야말로 한국에서 당면한 중요한 무역장벽」이라고 지적했고, 주한미국 상공회의소도 「한국내에서의 외국인 투자를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 국민과 공무원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외국인 혐오증」이라며 한국정부가 외국인 투자유치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적극 홍보해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물론 한국에 들어온 다국적 기업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단순히 생산 및 판매활동의 거점확보를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이제는 한국 기업으로 자리잡은 만큼 지금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동반자로서 한국경제 재건에 기꺼이 동참해야 한다. 그동안 인색했던 국내기업에 대한 첨단 기술이전을 적극화하고 선진 경영방식도 전수해야하며 과감하고도 대폭적인 신규 투자와 함께 국내 수출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한국기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세계경제시대의 도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특히 IFM 경제관리 체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국자본을 대거 유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는 그동안 외국기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질시하고 혐오했던 시각을 바로잡아야 한다. 세계는 우리에게 갈등과 반목을 접고 협력과 동반의 장으로 나오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당면한 경제난 극복과 21세기 나눔과 공존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우리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을 하루빨리 벗어버리고 진정한 세계화시대를 맞을 수 있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한 경쟁시대에서 생존자체가 힘든 일이다.
<구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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