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84)

그때마다 환철은 혜경의 그 불길을 다스려 주었다. 단 한번에 먹이를 채트리는 독수리처럼 환철은 혜경의 불길을 다스려 주었다. 굳이 내색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언제든 독수리는 혜경의 주변에 있었다.

독수리에 채여 하늘로 솟아오르는 순간 혜경은 늘 쾌락을 느꼈다. 하지만 고통이기도 했다.

그것은 선이었다. 하지만 악이기도 했다.

섹스. 분명 또 다른 세상이었다.

혜경에게 섹스는 쾌락이며 고통이었다. 선이며 악이었다. 선과 악, 쾌락과 고통.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선이든 악이든 다른 한쪽이 없으면 의미는 없다.

가혹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혜경에게 새로운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환철은 혜경의 육체와 의식의 불꽃이 커지기를 기다리는 독수리가 되어 늘 혜경의 곁에 있었다. 빙빙, 높은 하늘을 빙빙 도는 독수리가 되어 있었다.

혜경은 검은 연기와 함께 계속 솟구치는 불길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렌소리, 소방관들의 분주한 움직임. 꾸역꾸역 모여드는 사람들.

정말로 도시 전체가 불이 나버리면 어떠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기대감이기도 했다. 둘 다였다.

도로는 소방관들이 늘여 놓은 소방호스가 실뱀처럼 길게길게 늘어져 있었다. 팽팽했다. 계속 불이 솟구치는 맨홀로 물을 쏟아 붓고 있었지만 불길은 잡히지 않고 더욱 거세게 치솟고 있었다.

세종로 지하도에서도 검은 연기가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 주변사람들의 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종로쪽에 맨홀 하나가 더 열렸는지 또다시 불길이 하늘높이 솟구쳐 올랐다.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잠깐 소란스러워졌다. 혜경은 시청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뒤쪽건물을 바라보았다. 창연오피스텔. 맨 위층.

버러지가 기어가듯 온몸이 스멀스멀거렸다.

눈을 감았다. 침대. 혜경은 치워버린 초들을 생각했다. 침대 주변은 물론 방안 가득했던, 타다 만 초들.

순간 혜경은 승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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