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이 시작됐지만 한여름의 열기가 쉽게 가시지 않듯, 석유화학 업계를 둘러싼 대내외 환경도 좀처럼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글로벌 공급과잉과 수요 부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전쟁과 지정학적 갈등으로 원료와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까지 커지면서 기업들의 어려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난 봄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나프타 공급 차질이 현실화됐을 때 우리는 수액백과 주사기, 쓰레기봉투처럼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제품 하나하나가 석유화학산업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다시 한번 공급망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당시 기업들은 대체 물량 확보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급 안정에 나섰고, 정부도 신속하게 나프타를 경제안보품목으로 지정하는 한편 수출 제한과 매점매석 금지, 수입단가 차액 지원 등 시의적절한 대책으로 뒷받침했다. 기업과 정부가 한마음으로 대응한 덕분에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그러나 글로벌 공급과잉과 수요 부진, 원가 경쟁력 약화 등 기업들이 마주한 어려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제는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것을 넘어 산업의 근본적인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한 해법이 필요한 때다.
이런 가운데 비수도권의 산업용 전기요금 인하를 골자로 하는 산업용 지역 전기요금제가 연내 시행된다는 발표는 반가운 소식이다. 대표적인 에너지 다소비 업종인 석유화학산업의 원가 부담을 완화하고 경쟁력 회복을 지원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전기요금 개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산업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분야에 대한 과감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첫째, 원료 다변화다. 글로벌 석유화학산업이 에탄·프로판 등 원가 경쟁력 있는 원료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여전히 나프타 의존도가 높다. 에탄과 같은 경쟁력 있는 원료를 활용한다면 원가 경쟁력을 높이고 공급망 안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초기 투자가 요구된다. 에탄 전용 저장시설과 터미널, 배관망 등 대규모 인프라가 필수적이다.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인 만큼 국가 차원의 전략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원료 다변화를 개별 기업의 원가절감 사업이 아니라 우리 산업의 공급망 경쟁력을 높이는 국가적 과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산업구조의 전환 지원이다. 범용제품 중심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소재와 스페셜티 제품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전환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과 투자를 지원해야 한다. 설비 통합과 사업재편 과정에서 지역경제와 협력업체, 고용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지원도 살펴봐야 한다. 석유화학산업 전체가 지속 가능한 구조로 전환할 수 있도록, 질서 있는 사업재편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세심한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탄소중립이다. 국제사회의 탄소 감축 요구가 커지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확정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공급과잉과 수익성 악화로 사업재편에 나선 기업들에게 또다시 대규모 친환경 투자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을 충분히 고려한 접근이라고 보기 어렵다. 산업이 살아남아야 탄소중립 투자도 가능하다. 산업의 현실과 경쟁력을 반영한 속도와 지원이 필요하다.
지난 봄 나프타 대란을 겪으며 우리는 석유화학산업이 우리 일상을 떠받치는 동시에 국가의 제조업과 공급망을 지탱하는 경제안보의 핵심 산업임을 다시 확인했다. 이제 산업의 경쟁력을 지키는 일은 산업계만의 과제가 아니다. 원료와 에너지 경쟁력을 높이고 산업구조 전환과 탄소중립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꾸준한 관심과 실질적인 지원이 뒷받침 되길 기대한다.
엄찬왕 한국화학산업협회 상근부회장 eomcw@kci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