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인 일본 현대미술가 야요이 쿠사마가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7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쿠사마는 지난 14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소속 스튜디오인 쿠사마 스튜디오는 이날 홈페이지를 통해 그의 부고를 전했다.
스튜디오는 “쿠사마는 시각예술뿐 아니라 퍼포먼스와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 전위예술의 개척자였다”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작업을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고 밝혔다.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에서 태어난 쿠사마는 무수히 반복되는 점무늬와 '인피니티 네트', 노란 호박, 거울을 활용한 '인피니티 미러룸' 등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도 검은 점이 빼곡하게 찍힌 노란 호박 작품으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았다. 작품의 가치가 크게 상승하면서 국내 미술 애호가와 컬렉터 사이에서도 인기 작가로 꼽혔다. 지난 3월 서울옥션 경매에서는 2015년 제작된 'Pumpkin(MBOK)'이 104억5000만원에 거래되며 국내에서 팔린 쿠사마 작품 가운데 최고가를 기록했다.
국내 전시도 여러 차례 열렸다. 2013년 대구미술관에서는 '쿠사마 야요이: A Dream I Dreamed'라는 대형 개인전이 개최돼 회화·조각·설치 작품 100여 점이 소개됐다. 이듬해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도 대규모 전시가 관람객을 맞았다.
쿠사마에게 반복되는 점과 무늬는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선 의미를 지녔다. 어린 시절부터 환각을 겪었던 그는 자신의 신체와 주변 세계가 끝없이 반복되는 패턴에 녹아드는 듯한 경험을 작품에 담았다. 이를 바탕으로 한 '자기소멸(self-obliteration)'은 그의 예술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했다.
1958년 미국 뉴욕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쿠사마는 도널드 저드 등 당시 미술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화면 전체를 촘촘한 망으로 채우는 '인피니티 네트' 연작을 발표했다. 1960년대에는 천으로 제작한 남근 모양의 오브제를 가구와 생활용품에 반복해 부착한 '소프트 스컬프처'를 비롯해 퍼포먼스와 설치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1966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는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구슬 1500개를 잔디밭에 펼친 '나르시스 가든'을 공개했다. 당시 현장에서 '당신의 나르시시즘을 팝니다'라는 문구를 내걸고 구슬 하나를 2달러에 판매했으나 비엔날레 관계자들의 제지를 받았다.
1973년 일본으로 돌아온 쿠사마는 1977년부터 도쿄의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해 지내면서도 인근 작업실을 오가며 창작을 계속했다.
한동안 세계 미술계의 주목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에 참여하면서 다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거울과 조명, 끝없이 반복되는 형상을 활용해 무한한 공간감을 구현한 '인피니티 미러룸'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로 다시 떠올랐다.
그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워싱턴 허시혼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소개됐다.
쿠사마는 생전 자신의 예술적 위치에 대해 “내가 세상을 떠난 뒤 어떤 방식으로 평가될지는 알 수 없다”며 “아웃사이더로 남는 것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쿠사마 스튜디오는 “그가 남긴 뜻을 이어받아 예술을 통해 세계인에게 미래를 향한 희망과 용기를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이원지 기자 news21g@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