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의 승부는 자본의 크기보다 기다릴 수 있는 시간에서 갈릴 때가 많다. 원천기술이 시장을 열고, 첨단 제조 역량이 산업 생태계에 뿌리내리며, 전력망이 AI 경쟁력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린다. 문제는 그 시간을 누가 감당하느냐다.
민간 자본은 투자금을 회수해야 할 시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정책금융은 국내 기업을 폭넓게 지원해야 하는 만큼 특정 분야의 초장기·대규모 투자에 자본을 집중하는 데 제약이 있다. 반면 국부펀드는 단기적인 회수 압박을 넘어 한 세대 뒤를 내다볼 수 있다. 경제개발형 국부펀드들이 주식과 채권 운용을 넘어 AI·반도체·에너지 등 전략산업에 직접 투자하기 시작한 이유다.
세계 국부펀드의 운용자산은 지난해 말 15조 달러에 이르렀다.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다. 싱가포르 테마섹과 아랍에미리트 무바달라 같은 경제개발형 국부펀드가 첨단산업과 공급망 투자를 확대하며 역할 변화를 이끌고 있다.
무바달라는 이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미국 AMD가 반도체 제조 부문을 분리하자 아부다비 정부의 투자회사 ATIC은 AMD와 함께 글로벌파운드리를 세웠다. ATIC이 이후 무바달라에 통합된 뒤에도 투자는 이어졌고, 글로벌파운드리는 미국의 대표적 파운드리로 성장했다. 모두가 당장의 위험을 줄이는 데 몰두하던 시기에 반도체 제조 역량의 장기적 가치를 선택한 것이다. 국부펀드가 긴 시간을 산업 경쟁력으로 바꾼 사례다.
그러나 오래 기다릴 수 있다고 해서 모두 좋은 전략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투자 대상에 AI나 반도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바달라는 최근 5년과 10년 기준 연 10% 이상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반면 사우디 PIF의 일부 대형 사업에서 약 80억 달러의 자산 상각이 발생한 사례는 수익성 원칙이 우선순위에서 밀릴 때 전략투자의 지속 가능성도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수익성은 국가전략의 반대말이 아니라 전략을 이어가는 조건이다.
한국도 이제 초장기 전략투자를 감당할 자본이 필요하다. 정부는 2,320억 달러, 약 340조 원을 운용하는 한국투자공사(KIC)에 기존 외환보유액 계정과 분리된 전략투자계정을 신설해 종합형 국부펀드로 확대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두 계정 사이에는 방화벽을 두어 전략투자가 외환보유액 운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AI 인프라와 원천기술, 첨단 제조 등 민간과 정책금융만으로 채우기 어려운 장기투자의 공백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방향은 옳다.
성패는 설계에 달려 있다. 국가는 전략적으로 확보할 투자영역을 정하되, 어느 기업과 자산을 선택할지, 얼마에 언제 투자하고 언제 회수할지는 전문 운용진이 경제성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국가와 전문 운용진 사이의 역할 구분이 분명해야 국가전략과 수익성을 함께 지킬 수 있다.
평가와 재원 구조도 장기투자에 맞춰야 한다. 투자 건수나 단기 수익률만으로 성과를 재단하면 초장기 투자는 다시 단기성과 경쟁에 갇힌다. 장기 수익률과 전략적 성과를 함께 살피되, 투자 당시의 근거와 가격, 위험관리 기준을 꾸준히 검증해야 한다. 초기 출자 이후에는 운용수익을 재투자하고, 필요하면 자산매각이나 채권발행 등을 활용해 경기 상황과 관계없이 투자 여력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시장이 위축됐을 때 장기 가치가 있는 자산을 확보할 수 있어야 국부펀드의 강점이 드러난다.
투명성은 국내 신뢰만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해외 원천기술 기업이나 전략자산에 투자하려면 상대국 정부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경제적 원칙에 따라 투자하고 운용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신뢰가 없다면 필요한 전략자산에 접근하기 어렵다. 투명성은 공적 자금이 지켜야 할 규범인 동시에 해외 투자시장의 통행증이다.
긴 돈이 있다고 산업이 저절로 크는 것은 아니다. 긴 투자 기간에도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고, 성과를 검증하며, 수익을 다음 투자로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한국형 국부펀드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사업에 이름을 올렸느냐가 아니라, 긴 시간 뒤에도 경제성과 전략적 가치를 함께 입증했느냐로 평가받을 것이다.
국부펀드가 사는 것은 자산만이 아니다. 우리 산업이 미래를 준비할 시간도 함께 산다. 그 시간을 성과로 바꾸는 힘은 돈의 크기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운용 원칙에서 나온다.
송승혁 대한상공회의소 금융산업팀장 stooget@korcham.net
김시소 기자 siso@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