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플랫폼톡] 전자서명, 이제 허용이 아니라 기준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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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 모두싸인 대표

세계 주요국에서 전자서명은 더 이상 비대면 업무를 돕는 보조 수단이 아니다. 디지털 경제에서 '신뢰'를 뒷받침하는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 누가 무엇에 동의했는지, 그 의사와 책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달 부산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글로벌 시민 캠페인에서는 모두싸인의 전자서명 기술을 활용해 6개 언어로 세계 시민의 지지 의사를 모았다. 세계 시민의 의사를 전자적 기록으로 남긴 이 사례는 전자서명이 국경을 초월한 의사표현과 신뢰를 연결하는 인프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정보경제사회추진협회(JIPDEC)의 '기업 IT 이용·활용 동향조사 2026'에 따르면 종업원 50인 이상 일본 기업의 전자계약 이용률은 80.2%로 처음 80%를 넘어섰다. 반면에 '이용 예정 또는 검토 중'인 기업은 7.9%로 줄어 전자계약이 정착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아직 확산 초기 단계다. 모두싸인이 국내 연간 계약 건수와 전자서명 이용량을 바탕으로 추산한 계약 건수 기준 시장 침투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일본과 산정 기준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전자계약이 일상적인 업무 방식으로 자리 잡은 반면 한국에는 큰 성장 여력이 남아 있다.

일본은 2001년 전자서명법을 시행했지만 전자계약 이용률은 오랫동안 크게 늘지 않았다. 전환점은 2020년이었다. 총무성·법무성·경제산업성이 공동 질의응답(Q&A)를 통해 '이용자의 지시에 따라 사업자가 서명하는' 클라우드형 전자계약의 법적 기준을 구체화했고, 정부도 불필요한 날인·서면 요구를 줄이는 정비에 나섰다. 코로나19와 재택근무가 전환을 앞당겼지만, 기업이 안심하고 도입할 수 있는 기준과 환경도 확산을 뒷받침했다. 법은 이미 있었고, 시장을 움직인 것은 '명확한 기준'이었다.

미국은 전자서명에 관한 법률(E-Sign Act)을 통해 '전자적 형태'라는 이유만으로 전자문서·전자서명의 효력을 부정할 수 없도록 했다. 유럽연합(EU)도 전자 신원 인증 및 신뢰서비스에 관한 법률(eIDAS)로 서명의 신뢰 수준과 회원국 간 상호 인정 체계를 갖추고, 디지털 신원지갑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주요국은 특정 기술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전자적 결과를 일관되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다.

한국에서 확산을 더디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제도와 관행의 불확실성이다. 전자문서와 전자서명의 법적 효력은 원칙적으로 인정되지만, 현장에는 업무별 본인 확인과 보관, 감사 기준이 명확하지 않거나 기존의 서면·날인 절차가 남아 있어 종이를 병행하는 경우가 있다. 기업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가능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어떤 절차와 증빙을 갖추면 전자적 처리만으로 감사와 분쟁에 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다.

우선 공공기관의 감사·행정 실무에서 전자적 절차만으로 처리할 수 있는 요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어 부처별 대면 확인, 서면 제출, 원본 보관, 날인과 인감증명서 제출 요구를 전수 점검해 불필요한 요건은 폐지하고, 필요한 경우에도 전자적 대체 요건을 분명히 해야 한다. 거래 위험도에 따른 본인 확인 수준과 최소 증빙 기준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AI)이 계약서를 만들고 위험을 판단하는 시대일수록 이런 기준은 더 중요해진다. AI는 계약 업무를 도울 수는 있어도 사람의 동의와 책임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한국 전자서명 시장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또 한 번의 허용 선언이 아니라, 기업이 안심하고 전자적 절차만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이다.

이영준 모두싸인 대표 yj.lee@modusig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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