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 차이나] 돈이 아니라 성장 사다리 판다…국유자본이 다시 짠 중국 스타트업 생태계 [박지민의 비욘드 차이나]

〈상〉 CHINA STARTUP INVESTMENT ECOSYSTEM

Photo Image

중국 스타트업 투자시장을 이해하려면 투자 금액 순위부터 보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중국에서 창업기업은 엔젤투자자에게 돈만 받고 벤처캐피털로 넘어가지 않는다. 대학 연구실, 인큐베이터, 산업단지, 지방정부 기금, 대기업의 주문, 은행계 자금과 증권시장이 한 기업의 성장 과정에 차례로 개입한다. 유치원부터 초·중·고교와 대학까지 진학하듯 단계마다 다른 기관이 기업을 선별하고 다음 단계로 넘긴다. 중국 투자생태계의 힘은 개별 투자자의 안목보다 이 성장 사다리를 산업정책과 연결하는 능력에 있다.

그러나 사다리가 촘촘하다고 모든 기업이 잘 자라는 것은 아니다. 정책이 시장 판단을 대신하면 자금은 특정 산업과 지역에 몰리고, 기업은 고객보다 보조금을 먼저 찾는다. 최근 중국 벤처 시장은 민간 달러 자본이 주도하던 인터넷 시대에서 국유 위안화 자본이 주도하는 첨단 제조 시대로 이동했다. 기회의 산업이 바뀐 동시에 투자자 책임과 회수 방식도 달라졌다.

창업 유치원은 사람과 공간을 함께 고른다

초기 창업 단계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자본은 엔젤투자(天使投资)다. 중국 엔젤투자는 창업자 개인의 아이디어만 평가하지 않는다. 어느 대학과 연구소에서 기술이 나왔는지, 창업팀이 산업 현장을 이해하는지, 다음 투자자를 만날 도시와 산업단지가 있는지를 함께 본다. 전거펀드(真格基金), 이노베이션웍스(创新工场)처럼 초기기업에 투자하면서 인재 채용과 제품전략을 지원한 민간기관이 성장했고, 대학 동문과 빅테크 출신 창업자 네트워크도 중요한 자금원이 됐다.

인큐베이터와 액셀러레이터는 사무공간을 제공하는 기관을 넘어 정책과 자본의 접속점으로 작동한다. 베이징 중관촌창업거리(北京中关村创业大街), 상하이 장장(上海?江), 선전 난산(深圳南山), 항저우 드림타운(杭州?想小镇) 같은 거점에서는 창업팀이 임대료 지원, 시제품 제작, 정부사업 신청, 투자설명회와 산업 고객을 한꺼번에 만난다. 한국 창업보육센터와 비슷해 보이지만 지방정부 산업유치 목표와 연결된다는 점이 다르다.

좋은 보육 기관은 창업자 실패비용을 낮춘다. 실험실과 공용장비를 빌리고, 규제와 인증을 미리 검토하며, 첫 고객에게 기술을 시험할 수 있다. 반대로 입주기업 수와 행사 횟수가 성과지표가 되면 공간은 채워져도 기업은 성장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도 많은 창업 공간이 부동산 사업으로 변질됐고, 투자 혹한기가 오자 보조금이 끊긴 단지는 빠르게 비었다. 창업생태계의 첫 단계부터 '공간을 얼마나 공급했는가'보다 '다음 단계로 몇 곳을 넘겼는가'를 봐야 한다.

대학 기술이 창업기업으로 넘어가는 경로도 중요해졌다. 베이징의 대학·국가연구기관, 상하이의 바이오와 반도체 연구 기반, 허페이의 과학기술 인력은 지방정부 기금과 산업단지의 주요 공급원이다. 교수가 기술을 이전하고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세우거나, 연구자가 직접 창업한 뒤 정부 기금과 산업자본이 공동 투자한다. 논문을 기업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특허 소유권, 겸직과 성과 보상 기준을 먼저 정하지 않으면 대학과 창업자 사이 분쟁이 후속 투자를 막는다.

이 단계의 진짜 성과는 창업기업 수가 아니라 실험실 기술이 시장 언어로 번역되는 비율이다. 기술성숙도, 규제 허가와 양산 가능성을 판단할 전문인력이 부족하면 정부는 유명 교수 이름이나 특허 건수에 의존하게 된다. 중국이 기술이전 기관과 개념검증 자금을 확대하는 이유도 연구성과와 벤처투자 사이 빈칸을 메우기 위해서다.

민간 VC는 기술보다 성장 속도를 먼저 배웠다

인터넷 성장기 중국 벤처캐피털(VC:Venture Capital)은 미국식 달러 펀드 문법을 받아들였다. 홍산, IDG캐피털, 치밍벤처파트너스, 순웨이캐피털 같은 운용사는 빠르게 커지는 사용자와 시장점유율을 보고 여러 차례 후속 투자를 이어갔다. 알리바바·텐센트·바이두·메이퇀·바이트댄스가 성장한 배경에는 기업가뿐만 아니라 해외 상장과 우선주 계약, 스톡옵션에 익숙한 달러 펀드가 있었다.

이 시기 투자자는 지역에 공장을 세우는지보다 전국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케이맨제도 등에 지주회사를 두고 중국 사업회사를 지배하는 역외 구조가 보편화했고, 홍콩과 미국 증시가 회수시장이 됐다. 거대한 내수와 모바일 전환이 결합하면서 플랫폼 기업은 적자를 감수하고 이용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 벤처투자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민간 VC가 기업의 제품과 조직, 전국 확장 능력을 훈련시키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인터넷 플랫폼 규제, 미·중 갈등과 해외 상장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달러 펀드 역할은 줄었다. 중국 내 달러 펀드 투자 비중은 크게 낮아졌고, 민간 위안화 펀드도 회수 지연으로 신규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단순한 정부 보조금이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인도기금, 국유기업과 금융기관이 결합한 산업금융이었다.

정부 인도기금은 투자자가 아니라 자본 설계자다

정부 인도기금(政府引导基金)은 정부가 직접 모든 기업을 고르는 펀드가 아니다. 중앙 또는 지방정부가 모펀드에 출자하고 전문 운용사가 자펀드를 만들어 민간자본과 함께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구조다. 정부는 반도체·인공지능·양자·바이오·로봇·신에너지처럼 장기간 자금이 필요한 산업을 정하고, 운용사는 기업을 발굴한다. 지방정부는 여기에 산업단지, 토지, 세제, 인허가와 인재정책을 붙인다.

중국은 2025년 국가창업투자인도기금(国家创业投资引导基金) 구상을 제시하며 20년 동안 약 1조위안 지방·사회자본을 유도하겠다는 방향을 밝혔다. 통상적인 벤처펀드보다 긴 기간을 설정한 이유는 반도체와 신약, 첨단장비가 5~7년 안에 상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이 강조하는 '인내자본'은 낮은 수익률을 감수하는 돈이 아니라 기술 검증과 공장 증설, 고객 확보와 회수까지 기다릴 수 있는 자본을 뜻한다.

지방정부 역할은 더 직접적이다. 쑤저우는 반도체와 바이오, 허페이는 디스플레이·전기차, 선전은 하드웨어·로봇처럼 도시별 산업을 정하고 기업을 유치한다. 많은 펀드에는 지역 재투자 조건(返投)이 붙는다. 펀드가 출자금 일정 배수만큼 해당 지역 기업에 투자하거나 피투자기업이 본사·연구소·생산시설을 옮기도록 요구하는 방식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투자수익과 함께 고용·세수·공급망을 확보할 수 있다.

이 구조가 작동하면 연구실 기술이 산업으로 가는 시간이 짧아진다. 지방정부가 시험생산 공간을 제공하고 정부 인도기금이 초기 위험을 나누며, 국유기업이나 대기업이 첫 구매자가 되고 은행이 설비자금을 댄다. 투자와 입지, 고객과 대출이 한 묶음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중국 스타트업 성장 사다리는 자본시장이면서 산업유치 시스템이다.

은행 자본이 지분투자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 은행은 전통적으로 담보와 현금흐름이 부족한 스타트업에 대출하기 어려웠다. 이를 보완하는 장치가 은행 계열 금융자산투자회사(金融资?投资公司·AIC) 지분투자다. AIC는 사모펀드와 협력해 기술기업에 투자하고, 은행은 대출과 결제·자금관리를 제공한다. 중국 정부는 이 시범사업을 18개 도시와 이들 도시가 속한 성으로 확대했다. 2025년 5월 기준 투자 의향 체결액은 3800억위안, 당시 환율로 약 561억달러를 넘어섰다.

AIC 확대는 스타트업 자금조달이 VC만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초기기업은 지분투자를 받고, 성장단계에서는 설비금융과 운전자금을 함께 확보할 수 있다. 특히 공장과 생산라인이 필요한 반도체·배터리·로봇 기업에는 장점이 크다. 다만 은행계 자금이 위험을 충분히 평가하지 못한 채 정책목표를 좇으면 부실이 금융권으로 옮겨갈 수 있다. 지분투자와 대출을 한 그룹이 동시에 제공할 때 손실을 뒤로 미루거나 기업가치를 부풀릴 유인도 생긴다.

사모펀드와 증권사는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

기업이 매출과 고객을 확보하면 사모펀드(PE:Private Equity), 산업자본과 증권사가 등장한다. 이 단계의 자금은 제품 가능성보다 상장요건, 지배구조, 재무제표와 인수합병 가능성을 본다. VC가 성장속도를 높였다면 PE는 기업을 상장시장이나 전략적 매각에 맞게 정리한다. 증권사는 단순한 상장 주관사가 아니라 산업 적합성, 연구개발 인력, 주요 고객 의존도와 규제 위험을 사전에 점검하는 문지기다.

중국에서는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고 모두 같은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다. 반도체·첨단장비 기업은 상하이 커촹반(科创板), 혁신형 성장기업은 선전 촹예반(创业板), 전문성을 가진 중소기업은 베이징증권거래소를 검토한다. 적자 기술기업이나 국제자본이 필요한 기업은 홍콩을, 국제매출과 달라 구조를가진 기업은 미국을 볼 수 있다. 어느 시장으로 갈지는 마지막에 정하는 선택이 아니라 초기 투자통화와 법인구조에서 상당 부분 결정된다.

사모펀드는 상장만 준비하지 않는다. 업종 내 기업을 묶어 규모를 키우거나, 국유기업·상장사와 매각을 설계하고, 창업자의 일부 지분을 구주로 사서 개인 위험을 낮춘다. 좋은 성장자본은 창업자가 단기 기업가치에 매달리지 않도록 시간을 준다. 나쁜 성장자본은 상장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매출을 앞당기고 비용을 미루며, 환매 조항으로 위험을 창업자에게 전가한다. 같은 돈이라도 계약과 회수 기한에 따라 기업의 다음 행동이 달라진다.

성장 사다리 병목은 연결보다 책임에 있다

중국식 시스템 강점은 초기 투자, 실증, 첫 구매, 성장자본과 상장 준비를 연결한다는 데 있다. 약점도 같은 지점에서 나온다. 정부가 방향을 정하고 자금까지 공급하면 운용사가 나쁜 기업을 거절하기 어려워진다. 지역 재투자 조건이 과도하면 비슷한 공장과 산업단지가 여러 도시에 중복되고, 기업은 실제 수요보다 보조금이 많은 지역을 고른다. 국유자본이 손실 책임을 명확히 지지 않으면 장부상 기업가치만 유지한 채 회수를 미루기도 한다.

민간 자본이 줄어든 시장에서 정부자금이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마중물이 본류를 대체하면 가격발견이 약해진다. 투자위원회 독립성, 민간 출자자 실제 위험 분담, 후속 투자와 회수 실적을 함께 봐야 한다. 펀드 규모나 유니콘 수만으로 중국 생태계의 성공을 평가할 수 없는 이유다.

한국은 펀드보다 성장 단계 연결률을 봐야 한다

한국 정부는 모태펀드 규모를 키우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초기 투자 기업이 실증과 첫 구매, 성장금융과 인수합병으로 얼마나 이동했는지를 성과지표로 삼아야 한다. 정책목표와 수익률을 분리해 공시하고, 운용사 기업 선별을 지역 유치 목표에 종속시키지 않는 장치도 필요하다.

대기업은 CVC 투자 이후 공동개발과 구매로 이어진 비율을 높여야 한다. 지자체는 본사 이전과 투자유치 금액만 요구하지 말고 대학 연구실, 앵커기업 주문, 시험·인증설비와 설비금융을 묶어 제시해야 한다. 대학은 기술이전 계약 건수보다 창업기업의 3~5년 후 매출·고용·후속 투자를 추적해야 한다. 스타트업은 싼 정책자금만 볼 것이 아니라 지역 이전, 후속 투자, 지식재산권과 환매 조건을 따져야 한다.

중국에서 배워야 할 것은 국유자본 크기가 아니다. 기술을 발견하는 민간의 눈, 첫 시장을 여는 기업, 장기위험을 나누는 정부와 회수시장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동시에 각 단계에서 누가 판단하고 손실을 책임지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한국의 창업생태계는 학교를 많이 세우는 데 머물 것인가, 아니면 기업이 다음 단계로 실제 진학할 수 있는 성장 사다리를 만들 것인가.


김현민 기자 minkim@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