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스테이블코인 경쟁의 본질, 결국은 '신뢰'다

“금융은 결국 신뢰(Trust) 산업이다.”

은행과 핀테크의 최전선을 모두 경험하며 체감한 금융의 본질 역시 이 명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기술은 진화하고 서비스는 혁신되지만, 이용자가 마지막 순간 선택하는 기준은 결국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다. 최근 급부상하는 스테이블코인 논의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시장은 '발행 주체'를 둘러싼 패권 경쟁에 몰두하고 있지만, 정작 본질적인 질문은 놓치고 있다. 바로 '누가 스테이블코인을 가장 안정적이고 검증 가능한 구조로 설계할 수 있는가'다.

최근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를 본격화했고, 글로벌 결제 기업과 빅테크는 이를 차세대 디지털 결제 인프라로 빠르게 편입시키고 있다. 국내 금융권과 핀테크 업계 역시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 구조를 검토하며 대응에 분주하다. 그러나 국내 논의의 중심은 여전히 '은행 중심으로 갈 것인가' '비은행 기관에도 발행을 허용할 것인가'와 같은 전통적인 발행 헤게모니 싸움에 머물러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발행 주체와 제도적 설계는 금융 안정성과 통화 질서의 근간을 좌우하기에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의 무게중심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제 시장은 '누가 발행하는가(Who)'보다, '누가 더 고도화된 신뢰 구조를 제공하는가(How)'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실시간 유통과 상시 잔고대사의 시대

전통 금융체계에서 신뢰는 규제 제도와 거대 기관, 브랜드라는 장벽을 통해 형성됐다. 시스템 전체가 일종의 '신뢰 보증인' 역할을 수행했기에 고객은 그 실체를 별도로 검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블록체인 네트워크 위에서 작동하는 스테이블코인은 메커니즘이 전혀 다르다. 토큰이 국경을 넘어 24시간 실시간으로 유통되는 환경에서 이용자는 더 이상 관행적 신뢰에 기대지 않는다. 이들은 준비금의 실제 존재 여부, 즉각적인 상환 가능성, 거래 프로세스의 안전성에 대해 보다 직접적이고 기술적인 '검증 가능성(Verifiability)'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글로벌 시장의 생존 게임도 이 신뢰 구조의 완성도에서 갈리는 중이다. 준비금 포트폴리오의 투명성, 실시간 청산 체계, 제3자 외부 감사, 온체인(On-chain) 기반 검증 구조 등이 시장 신뢰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특히 사후 보고 체계에 의존했던 기존 금융과 달리, 초연결·초고속의 디지털 자산 시장에서는 문제가 발생한 이후의 대응만으로는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발행량과 실제 준비금의 일치 여부를 상시 파악하는 '상시 잔고대사 모니터링' 체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최근 발생한 유럽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스테이블러(StablR)'의 페그 붕괴 사례는 이러한 위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준비금 기반 구조와 규제 준수를 강조했던 스테이블코인조차 멀티시그(Multi-signature) 키 관리와 거버넌스 실패로 대규모 무단 발행 사고를 겪었다. 이번 사고는 스마트계약 자체의 결함보다 운영 권한 통제와 신뢰 구조의 취약성이 핵심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스테이블코인 시대의 리스크는 단순 담보 보유 여부를 넘어, 발행·운영·검증 체계 전반의 신뢰 구조 설계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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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코인 신뢰 구조의 재편

◇단순 데이터 보고의 한계, 영지식증명(ZKP)에서 답을 찾다

운영 데이터를 감독 당국에 제출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모니터링이 촘촘해질수록 이용자의 거래·자산 정보가 과도하게 노출될 수 있다는 '프라이버시의 역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출된 데이터 자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결국 디지털 금융 환경에서는 단순한 데이터 보고(Reporting)를 넘어, 장부 구조 자체를 '검증 가능한 데이터 구조(Verifiable Data Structure)'로 설계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된다.

이 지점에서 주목받는 핵심 기술이 바로 영지식증명(ZKP)이다. ZKP는 민감한 금융 거래 정보를 외부에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준비금 보유 여부나 자산 일치성 등 핵심 사실만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최근 국제표준화기구 ISO/IEC 역시 ISO/IEC 27565:2026 표준을 통해 ZKP를 개인정보 최소 공개와 검증 가능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핵심 프라이버시 강화 기술(PET)로 공식 정의했다. 특히 해당 표준은 CBDC와 디지털자산 환경에서 ZKP가 자금세탁방지(AML) 규제와 프라이버시 보호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구조적 대안임을 명시하고 있다.

과거에는 대규모 실시간 거래 환경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연산 성능의 한계도 존재했으나, 최근 증명 효율성이 빠르게 개선되며 상용화 수준의 기술적 성숙도를 확보해가고 있다. 프라이버시 보호와 실시간 검증 가능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이러한 아키텍처는 차세대 금융 인프라의 새로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미래 금융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공개하느냐'보다, '얼마나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검증 가능한 신뢰를 제공할 수 있느냐'로 이동하고 있다.

◇은행의 리스크 관리와 핀테크의 기술 혁신이 결합해야

이런 변화 속에서 은행과 핀테크의 역할은 대립이 아닌 '융합'으로 수렴돼야 한다. 은행은 오랜 시간 축적한 금융 안정성과 전통적인 리스크 관리 역량을 갖고 있고, 핀테크는 민첩한 기술 혁신과 데이터 기반 운영 능력에 강점을 지닌다. 제도적 안정성과 기술 기반 검증 체계가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글로벌 시장이 요구하는 신뢰 구조가 완성될 수 있다.

더욱이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지급결제 수단을 넘어 결제·송금·정산·자산거래를 연결하는 새로운 디지털 금융 레이어로 진화하고 있다. 인공지능(AI)과 플랫폼 경제가 확대될수록 인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AI 에이전트 간 거래, 글로벌 콘텐츠의 실시간 초소액 정산 등 '프로그래밍 가능한 화폐(Programmable Money)'의 활용 영역 역시 폭발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역시 발행 주체 중심의 소모적 논쟁을 넘어, 얼마나 안전하고 실시간으로 검증 가능한 '신뢰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인지 본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스테이블코인 시대의 승부는 더 이상 누가 먼저 발행하느냐에 있지 않다. 시장이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구조를 누가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미래 금융의 경쟁력은 디지털 화폐 자체보다, 안정성과 검증 가능성을 얼마나 지속 가능하게 구현할 수 있느냐에 있다. 이제 금융 인프라는 제도적 권위만으로 유지되는 시대를 넘어, 디지털 네트워크 위에서 실시간으로 검증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김봉규 한양대 공과대학 겸임교수·지크립토 전무(Ph.D.) alex@zkryp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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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한양대 교수

〈필자〉2004년부터 KG이니시스, 농협은행 등에서 스마트금융·핀테크·디지털R&D 분야의 주요 직무를 수행했다. 특히, NH농협은행에서 디지털R&D센터장을 역임하면서 오픈뱅킹 전신 격인 오픈 API를 국내 최초로 기획했다. 블록체인 기반 P2P 원리금수취권 보관서비스 도입, 한국은행 CBDC 연구·기반 플랫폼 구축 등 디지털금융 혁신 과제를 주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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