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경쟁력은 더 이상 가격과 품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세보다 더 무서운 건 서류 지연과 데이터 병목입니다.”

고진 한국무역정보통신(KTNET) 대표는 최근 통상 환경을 이렇게 진단했다. 주요국의 보호무역 기조가 재확산되고 원산지 검증과 통관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기업이 체감하는 비용은 관세율 자체보다 '절차의 불확실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서류 하나가 지연되면 금융, 통관, 물류가 동시에 멈춘다. 무역 경쟁력은 물건이 아니라 '데이터를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흘려보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고 대표 판단이다.
KTNET은 국가 전자무역기반시설 운영기관이다. 수출입 신고, 통관, 물류, 금융에 필요한 각종 무역 문서를 전자적으로 중계하는 인프라를 30년 넘게 맡아왔다. 눈에 띄지 않지만, 하루 수십만건의 데이터가 이 통로를 지나며 수출입 현장을 지탱한다. 고 대표는 이를 “전력망·통신망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2024년 가을 취임 이후 KTNET의 정체성을 '중계기관'에서 '데이터 플랫폼'으로 전환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단순히 서류의 전자화를 넘어 무역·물류 전 주기의 데이터를 연결하고, 인공지능(AI) 기반 분석으로 기업의 통상 리스크를 사전에 낮춘다는 구상이다. 핵심 키워드는 △전자선하증권(e-B/L) △데이터스페이스(Dataspace) △AI 기반 전자물류 플랫폼이다. e-B/L은 해상 운송에서 화물 소유권과 인도 권리를 증명하는 '선하증권'을 전자문서로 구현한 것이다. 데이터스페이스는 기업·기관이 각자 보유한 데이터를 한 곳에 모으는 저장소가 아니라, 필요한 범위에서 신뢰를 기반으로 공유·연결하는 체계다.
고 대표는 전자정부 수출과 무역·물류 시스템 수출이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라고 바라봤다. 행정 시스템을 디지털 플랫폼으로 전환해 해외에 이식하는 작업이나, 통관·물류·원산지 관리 같은 무역 인프라를 디지털화해 해외 확산하는 작업 모두 '플랫폼형 공공 인프라 수출'이라는 점에서 맥락이 같다는 설명이다. 그는 지난 정부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공공부문 데이터·플랫폼 전환 전략을 총괄했다. 정부 시스템을 수출하든, 무역·물류 시스템을 수출하든, 핵심은 데이터 표준과 운영 모델을 패키지로 만드는 것이라는 게 고 대표의 인식이다.
다음은 고진 KTNET 대표와의 일문일답.

-무역·물류 디지털 전환을 '플랫폼 2.0'으로 규정한 배경은. 기존 전자무역 체계와 무엇이 다른가.
△지금까지 전자무역은 종이 문서를 전자문서로 바꾸는 수준에 머물렀다. 효율은 분명 개선됐지만, 통상 환경이 복잡해지면서 단순 전자화만으로는 기업이 체감하는 리스크를 줄이기 어려워졌다. 관세보다 비관세 장벽이 중요해지고, 원산지 검증·공급망 투명성 요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통관, 금융, 물류, 원산지 관리가 각각 따로 움직이면 한계는 분명하다. 플랫폼 전환은 이 흐름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다. 기업이 한 번 입력한 데이터가 여러 절차로 자동 연동되고, 오류나 지연 가능성을 사전에 걸러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전자무역의 다음 단계라고 볼 수 있다.
-e-B/L을 '디지털 물류의 분기점'이라고 표현했다. 현장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나.
△선하증권은 해상 운송에서 화물 소유권과 인도 권리를 증명하는 핵심 문서다. 이 문서가 종이로 오가다 보니 국제우편이나 특송 과정에서 며칠씩 지연되는 경우가 잦았고, 분실·위·변조 위험도 상존했다. 그 결과 무역금융(네고) 처리, 통관, 화물 인도까지 연쇄적으로 늦어지는 병목이 발생했다. e-B/L은 이 문서를 디지털로 구현해 은행, 선사, 화주가 동시에 확인하고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 물류 흐름이 빨라지고, 금융 처리 속도도 개선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서류 때문에 물건이 멈추는' 비합리적 비용을 구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체감 효과가 크다.
-e-B/L이 실제로 쓰이려면 국제 표준과 제도 정합성이 중요하다. 현실적 과제는 무엇인가.
△기술적으로 전자문서를 구현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국제 해운·금융 시장에서 이를 신뢰하고 받아들이느냐다. 글로벌 선사, 은행, 보험사가 모두 인정해야 실제 거래에 쓰일 수 있다. 그래서 국제 해운 표준에 맞춘 구조로 시스템을 설계했고, 보험사 인증을 확보하는 과정도 병행하고 있다. 종이 문서가 가진 법적 효력을 전자문서가 대체하려면 제도적 기반과 시장 신뢰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단기간에 모든 관행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한 번 전환이 시작되면 물류·금융 프로세스 전반에 연쇄적인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본다.
-데이터스페이스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다. 무역 현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나.
△데이터스페이스는 데이터를 한 곳에 모두 모아두는 저장소가 아니다. 기업과 기관이 각자 보유한 무역·물류 데이터를 필요한 범위에서 안전하게 공유·연결하는 체계다. 지금은 통관 데이터, 물류 데이터, 원산지 데이터가 각각 따로 관리되다 보니, 기업이 규제나 검증 요구에 대응하려면 여러 기관을 오가며 자료를 맞춰야 한다. 데이터스페이스는 이런 단절을 줄이는 인프라다. 앞으로는 가격이나 품질뿐 아니라 공급망 투명성, 탄소 정보, 원산지 이력 등 '검증 가능한 데이터'가 경쟁력이 된다. 데이터스페이스는 이런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이라고 본다.
-AI를 무역·물류에 적용하는 데 현실적인 한계는 없나. 실제 현장에서 쓸 만한 영역은.
△AI는 만능 해결책이 아니다. 다만 반복적이고 오류가 잦은 업무를 줄이는 데는 분명한 효과가 있다. HS코드 분류처럼 규칙이 복잡하고 사람마다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영역, 서류 작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순 오류, 물류 지연 가능성을 사전에 예측하는 영역 등은 AI 적용 효과가 크다. 중요한 건 AI를 얹기 위해 시스템 구조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존 프로세스를 그대로 둔 채 AI만 붙이면 현장 체감이 크지 않다. 업무 흐름 자체를 디지털 전제 구조로 바꾸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중소·중견기업은 디지털 전환 부담이 더 크다. 체감도를 높이는 방안은.
△대기업은 전담 인력과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중소기업은 통상 규정과 서류 요건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 원산지관리나 FTA 증빙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규정을 일일이 숙지하고 대응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시스템이 규정을 기억하고 자동으로 점검해주는 구조로 가야 한다. 원산지관리시스템을 ERP와 연계해 자동화하면 사후 검증 리스크를 크게 줄일 수 있다. 디지털 전환은 기술 도입 이전에 '현장의 부담을 얼마나 덜어주느냐'가 성패를 가른다고 본다.
-필리핀을 비롯해 해외에서 우리 전자무역시스템이 주목받고 있다. 해외로 발을 넓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자정부 수출과 무역·물류 시스템 수출은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다. 공공 시스템을 디지털 플랫폼으로 만들어 다른 국가에 이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필리핀 사례는 원산지관리 시스템을 공공 인프라로 구축한 경험이고, 이를 통해 현지 기업과 행정기관이 동시에 디지털 전환 효과를 체감했다. 단순히 시스템을 깔아주는 게 아니라, 데이터 표준과 운영 모델까지 함께 이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무역·물류 디지털 인프라는 새로운 수출 산업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민간기업이지만 공공의 영역에 있다. 공공성과 수익성의 균형은 어떻게 보나.
△전자무역 인프라는 24시간 멈추면 안 되는 공공 인프라다. 기본 서비스는 공공성을 최우선으로 유지해야 한다. 다만 데이터 분석, AI 기반 고부가 서비스는 지속 가능한 수익 모델로 만들어야 장기적인 투자 여력이 생긴다. 공공성과 수익성은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라, 역할을 분리해 병행할 수 있는 구조다. 기본 인프라는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부가 서비스는 재투자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인프라를 고도화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정부 정책 측면에서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무역·물류 AI를 국가 AI 전략의 핵심 의제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데이터 활용과 관련된 규제도 산업 현실에 맞게 정비해야 한다. 기업이 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통상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전자송장 국제표준(PEPPOL) 등 글로벌 디지털 통상 규범에 대한 대응도 더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통상 환경은 빠르게 변하는데, 제도 정비 속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기업 부담으로 이어진다.
-임기 동안 가장 이루고 싶은 목표는.
△KTNET이 '서류를 전달하는 기관'이 아니라, 기업이 통상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이터 인프라'로 인식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무역 현장에서 “KTNET이 있어서 리스크를 줄일 수 있었다”는 평가를 듣는다면 역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전환은 단기간에 성과가 드러나지 않지만, 한 번 구조를 만들어 놓으면 현장의 체질이 바뀐다. 그 토대를 만드는 게 제 역할이라고 본다.

대담=조정형 정치정책부장
정리=안영국기자
사진=박지호기자
◇인물·조직 전환 배경
고 대표가 KTNET에 부임한 지 1년 반. 그는 취임 직후 외부 진단을 통해 조직과 사업 구조를 전면 점검했다. 30년 넘게 이어진 전자무역 인프라 운영 방식이 디지털 전환 속도에 비해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본부 체계를 슬림화하고, 무역·물류 핵심 사업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보고와 회의 중심의 문화도 현장·협업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을 병행했다.
공조직 성격이 강한 조직에서 구조 개편은 쉽지 않았다. 비용 절감과 안정적 운영이 우선돼 왔지만, 그 과정에서 시스템 노후화와 신규 투자 지연이 누적됐다. 고 대표는 “지금은 단기 수익보다 중장기 생존을 위한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취임 이후 시스템 이중화, 백업 체계 강화, 장애 대응 프로세스 정비 등 '보이지 않는 투자'를 우선 과제로 삼았다. 고 대표는 “전자무역 인프라는 사회기반시설이라는 인식이 정책적으로도 더 분명해질 필요가 있다”며 “보이지 않는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국가 경쟁력의 기초”라고 강조했다.
◇고진 한국무역정보통신(KTNET) 대표는=AI·플랫폼·ICT 융합 분야를 두루 거친 기술·산업 정책 전문가다. 산업 현장과 공공 정책을 동시에 경험한 'AX플랫폼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러큐스대에서 컴퓨터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에서는 AI를 전공했다. 바로비전 창업을 통해 기업가로 활동했으며, 갤럭시아커뮤니케이션즈 대표, 한국모바일산업연합회(MOIBA) 회장을 지내며 산업계 전반의 디지털 전환을 이끌었다.
윤석열 정부 대통령 직속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공공부문 디지털 플랫폼 전환 전략을 총괄했다. 문재인 정부에선 4차산업혁명위원회 산업경제혁신위원회 위원장, 스마트시티특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024년 9월 KTNET 대표로 취임한 뒤 민간·공공을 넘나든 경험을 바탕으로 전자무역·물류 시스템의 AX 플랫폼화와 해외 확산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안영국 기자 ang@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