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사람들이 기록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명언 중에 'B와 D 사이 C'가 있을 게다. 인간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탄생(Birth)와 죽음(Death) 사이에 C가 있다는 아주 단순한 영어 알파벳 경구다. 여기서 C는 선택(Choice)이다. 인생 전과정 중에 수많은 선택이 있고, 오히려 그 선택들이 인생 전체를 만들어 간다는 가르침이다. 절묘하다.
같은 방법으로 'R와 S사이' 얘기를 해볼까한다. 여기서 R는 전 세계 자금 흐름을 공포에 빠뜨린 무시무시한 '경기침체(Recession)'의 R다. S는 더 장기적 빈사 상태를 뜻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의 맨 앞글자 S다. 글로벌 자본시장의 심장부 미국 뉴욕을 휘감고 있는 이 두 단어에 전세계가 떨고 있다.
다 알다시피 순서상 R와 S 사이엔 아무 것도 없다. 둘은 붙어 있는 알파벳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이 경기침체에 더해 초고물가, 대량 실업, 화폐가치 하락 등이 중첩되는 상황이니 알파벳 순서상으론 맞다. 하지만, 그 사이 인간이 선택하거나, 꼽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사라진 틈인 셈이다.
손 쓸 방법도 틈도 없이 전 세계 경기가 추락하고 있다. 1920년대 세계 대공황의 공포까지 100년만에 부활해 어른거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아쇠를 당겨버린 관세 전쟁은 100년 전 통상 40% 가량 매겨졌던 관세를 평균 70~75%까지 치솟게 만들었던 보호무역주의, 민족주의경제 성향과 판박이다. 물가는 뛰고, 기존 산업체계가 탈바꿈하면서 일자리는 사라졌다. 전 세계가 일시에 가난해졌다.
100년 전에 지금과 또 하나 비슷한 현상은 신기술의 등장과 확산이다. 현대판 증기기관 발명에 비견되는 내연기관의 등장이 세상을 바꿔 놓았다. 공교롭게도 내연기관은 증기로 움직이던 공장과 일자리를 뒤바꿔 놓았다. 공장에는 컨베이어라는 '분업과 생산성 극대화'라는 상징적 장치가 깔렸다. 그 유명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는 이 때를 그리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약하고, 전혀 안될 것 같은 것을 바꿔온 게 인류의 역사다. 100년 전 대공황이 재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달렸다. 사실, 우리는 달리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재앙은 미국으로부터, 중국으로부터 밀려들고 있다. 이런 불가항력적 상황이 우리의 비극이자 비운이다.
다만, 나락에 빠지지 않을 우리만의 묘책이 없지 않다. R와 S 사이에 알파벳으론 아무 것도 없지만 R와 S사이엔 수많은 단어가 존재한다. 사전을 펴보면 금새 알 수 있다. 더 비참해지는 단어도 있지만, 희망담은 단어들도 수없이 많다. 특히 Re가 '다시'를 뜻하는 접두어여서 보통의 단어에 Re를 붙여 재도약, 재도전, 재출발 같은 단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절망 만큼 앞길에 나쁜 건 없다. 해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하는 경우가 그렇다. 부딪혀 견뎌보면 아무리 힘든 상황도 조금 나아질 방법이 나오고, 다음번에 똑같은 위기나 위험 상황을 아예 되풀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의 침체나 스태그플레이션, 대공황의 공포를 넘어설 우리만의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위기를 딛고, 마침내 웃을 수 있다.
이진호 논설위원실장 jho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