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
1990년 3월 16일 금요일 밤 12시 무렵. 정근모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집 거실 전화벨이 적막을 깨고 울렸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장로)인 정 이사장은 이날 금요저녁예배를 마치고 귀가해 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전화지?”
전화기를 들자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청와대 이현우 경호실장 전화였다. “안녕하세요, 청와대 이현우 경호실장입니다. 대통령께서 지금 통화를 원하십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깜짝 전화였다. 잠시 후 전화기 너머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계적인 석학이신 정 박사께 부탁해야겠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과학기술처 장관을 맡아 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입각 통보 전화였다.
정근모 장관의 회고. “대통령 말은 통고나 다름없었다. 나는 친구인 이상희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이 유임할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대통령 전화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 준비없이 장관을 맡게 됐다.”(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이튿날인 1990년 3월 17일 토요일 오전 10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6공화국 출범 이래 최대 규모의 개각을 단행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개각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이승윤 민주자유당 의원, 과학기술처 장관에 정근모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상공부 장관에 박필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 통일원 장관에 홍설철 대통령 비서실장을 각각 임명하는 등 15개 부처 장관을 교체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에는 노재봉 정치담당특보를 기용했다. 개각에서 강영훈 국무총리, 이어령 문화부 장관, 이우재 체신부 장관, 정원식 문교부 장관 등은 유임됐다.
이수정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개각 배경과 관련해 “이번 대폭 개각은 정계 개편으로 굳건하고 안정된 기틀이 마련됨에 따라 새로운 정부의 진용과 체제를 갖춰 국정 분위기와 민심을 쇄신하고 국민이 기대하는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단행했다”면서 “여야를 망라해서 능력과 경험 있는 인사를 폭넓게 기용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16일 오후 5시에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강영훈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 전원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이 같은 소식에 부처마다 장관의 유임과 경질을 놓고 점치기가 무성했다. 만약 장관이 바뀐다면 누가 후임으로 올까를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과학기술처 관계자의 말.
“당시 과학기술처 내부에서는 이상희 장관은 유임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 장관이 개각 1개월 전에 새해 업무보고를 했고, 재임 중 기초과학연구진흥을 비롯한 다양한 과기정책을 추진해 과학기술계의 평가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장관 인사는 대통령 선택이었다.
1990년 3월 19일 오전 10시. 청와대 접견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이승윤 부총리를 비롯한 정근모 과학기술처 장관 등 신임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신임 각료들에게 “일하는 장관, 실천하는 정부의 모습을 국민이 실감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이 같이 말하고 “한 사람의 천재보다 두 사람의 지혜가 낫다는 것이 나의 신조”라며 부처 간 협력을 강조했다.
임명장을 받은 신임 각료들은 강영훈 국무총리 주재로 이날 오전 11시 정부종합청사에서 상견례를 겸한 국무위원 간담회를 열었다.
강영훈 총리는 “여러분은 중요한 시기에 임명장을 받은 만큼 소신껏 일하고, 부처 간에 서로 잘 협력해 나가자”고 말했다.
정근모 장관은 이날 오후 과학기술처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갖고 업무를 시작했다.
정 장관은 취임식에서 “과학기술계에 몸담았던 과학자로서 과학기술이 한국 경제의 난국을 해결하고 복지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정 장관은 “과학기술 발전은 눈앞에 바로 보이는 게 아니라 마라톤과 같아서 멀리 내다보고 하나하나 풀어 나가야 한다”면서 “과학기술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정 장관은 “산업계와 연구소에서 필요로 하는 고급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데 역점을 두겠다”면서 “최근 세계 각국이 기술보호주의를 강화하는 추세에 따라 기술외교를 강화, 선진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근모 신임 장관은 '수재 과학자'로 유명했다.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6·25 전쟁 중에 치른 제1회 국가고시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해 경기중학교에 입학했고, 경기고등학교에도 수석으로 입학했다. 고1 때 대학 입학 검정고시에 수석 합격, 서울대 물리학과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1959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2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응용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연소 박사 기록이었다. 정 박사는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에서 한국인 최초로 핵융합 연구를 하다가 27살이던 1967년 뉴욕공대 전기물리학부 부교수겸 풀라스마 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9년에는 한국과학원(현 KAIST) 설립을 한국과 미국에 최초로 제안했고, 미국에서 600만달러 차관을 받아 KAIST 설립을 주도했다. 최종 보고서도 작성하는 등 KAIST 설립 산파역을 했다.
잠시 그 과정을 살펴보자.
1969년 1월 미국 뉴욕공대에서 교수로 일하던 정근모 박사는 스승이자 멘토인 존 해너 미시간주립대 총장이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처장에 취임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해너 처장은 기사에서 “개발도상국에 물고기를 주는 대신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치겠다”고 밝혔다.
이를 본 정 박사는 자신이 하버드대 행정대학원(현 케네디스쿨) 과학기술 정책과정에 다니면서 쓴 '후진국에서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란 논문을 들고 스승인 해너 처장을 만나러 갔다. 오랜만에 제자를 만난 해너 처장은 “이 논문을 USAID 사업을 위한 계획서로 고쳐서 작성해 주게”라고 말했다.
정 박사는 1969년 10월 기존 논문을 바탕으로 영문 60쪽 분량으로 '한국에 응용과학 및 공학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안건'이란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USAID에 넘겼다. 이 계획서가 KAIST 설립 최초의 제안서이다.
해너 처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새로운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을 권고하는 편지와 함께 정 박사가 작성한 제안서를 함께 보냈다. 정 박사는 1970년 3월 일시 귀국해 4월 8일 당정협의회에서 한국과학원 설립안을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보고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 박사는 조사단 선발대로 1970년 8월 초 조사단장인 프레더릭 터먼 박사와 함께 귀국했고, 1970년 12월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보고서'도 작성했다.
한국과학원이 출범하자 당시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의 강력한 요청으로 1971년 2월 23일 귀국해 초대 부원장 겸 교수로 부임했다.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정 박사는 5공화국이 명운을 걸고 추진한 전자식교환기 개발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 박사의 증언.
“1970년대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과학기술 정책수단(STPI)회의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전자식 전자교환기를 자체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델리 전자통신연구소를 방문해 보니 반도체를 이용해 전자식 교환기를 제작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한국도 전자식교환기 시스템을 개발하면 전화 적체 문제를 해결하고 통신산업도 육성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귀국하자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인 김재익 박사 집으로 찾아가 '한국도 전자식 전화교환기 개발팀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날 우리는 미래 기술강국으로 가는 방안을 놓고 밤새 대화를 나누었다.”(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정 장관은 취임 후 대학연구 활성화와 대덕연구단지 완공, 산업계가 선진국처럼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대거 투자하고 그 결과를 적극 활용하는 시스템 구축 등을 적극 추진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