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드라마를 보던 중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남자 주인공이 안전모나 기타 개인보호구 없이 양복과 구두 차림으로 사다리에 오른 것이다. 특히나 아무도 사다리를 잡거나 고정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작업은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후 남자 주인공이 사다리에서 떨어지며 여자 주인공과 포옹하는 코믹한 장면도 나왔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이 무척이나 심란하게 다가왔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사다리 추락 사고로 200명이 넘는 사람이 중대재해를 입었다. 누구는 '웃자고 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통계는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추락 사고의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장면은 대중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크다.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며 상당한 고용을 창출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3 콘텐츠산업백서'에 따르면 국내 미디어·엔터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2022년 기준 64만명이 넘고, 매출은 151조원에 달한다. 게다가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과 K팝, K콘텐츠의 글로벌 확산으로 이 산업의 영향력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으며, 외국인들 또한 국내 미디어·엔터 산업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진다.
이러한 배경에서 미디어·엔터 산업의 사회적 파급효과, 환경 보호, 기후변화 대응, 거버넌스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전자나 의류업과 같은 전통 제조업에 비해 미디어·엔터 산업의 지속가능경영은 비교적 최근에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대형 언론사는 사회의 공공재라는 인식 하에 다양한 규제와 규범의 영향을 받고 있어, 일부에서는 선도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연예인의 출연을 규제하거나 방송인들이 따라야 할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기도 한다. 반면에 소규모 미디어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나 지속가능경영과의 접점이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실행 수준 역시 높지 않다.
최근 엔터 산업의 지속가능경영은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산업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청소년 인권, 다양성, 창작자와 아티스트-경영진 간 구조적 갈등과 공정거래, 종사자 소득 양극화, 환경오염·탄소배출, 원주민·전통문화 보호 등 여러 이슈가 부각되고 있다. 미디어·엔터 산업은 창의적 자산과 기업의 상업적 이익 간의 균형, 아티스트 권리, 지배권 배분이라는 특수한 상황도 존재한다.
최근 특정 엔터 기업이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지속 가능한 기업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긍정적인 사례도 있다. 이 기업은 친환경 에너지 이용과 탄소 배출 감소를 강조하고 있다. 이와 다르게 모 아이돌 그룹과 그 소속사의 경영진, 창작자가 얽힌 폭로와 갈등, 국회 청문회 참석과 같은 사건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노출되고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디어·엔터 기업과 종사자들은 소비자와 팬,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의사 결정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미디어·엔터 산업에 지속가능경영에 따른 규범을 강하게 적용하면 창의성을 제한하는 부정적 영향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의성과 예술성을 추구하면서 생명과 인격의 존중, 그리고 종사자의 안전이라는 기본을 준수하는 것은 시장 참여자의 노력과 가이드라인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기업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고 소비자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미디어·엔터 산업의 주요 경영자와 아티스트, 창작자와 엔지니어 등 종사자들은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나왔던 대사처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특별히 생명과 안전, 인권과 환경의 이슈는 한번 더 생각하고 다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용진 KIS자산평가 ESG사업본부장 yongjin.park@kispric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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