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창의와 혁신] 〈19〉'대학 응원가'에서 고민하는 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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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

초중고는 공동체 일원이 되기 위해 정부가 정한 교과과정 등 지식을 '습득'하는 교육기관이다. 대학은 다르다. 창의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지식을 '창출'하는 교육기관이다. 나라가 어려울 땐 자유의 불을 밝히고 정의의 길을 달리고 진리의 샘을 지켰다. 지금은 어떤가. 대부분 시간을 취업활동에 쏟는다. 기성세대가 짜놓은 미래에 실망하지만 그들을 답습한다. 공동체의 공정이 중요하지만 자신의 이해관계가 먼저다. 모방에 그치고 창의가 없다.

대학 응원가를 보자. 호소력 짙고 웅장하지만 창의와는 거리가 멀다. 연세대 응원가 '서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3악장'에 선배 시인 윤동주의 '서시'를 가사로 붙였다. 고려대 응원가 '민족의 아리아'는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의 '멜로드라마'에 교수를 지냈던 시인 조지훈의 '호상비문'을 가사로 썼다. 한양대, 중앙대, 서울대 등 다른 대학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미 나와 있는 곡과 가사를 결합하는 것도 흥미로운 시도다. 그러나 새롭고 멋진 응원가를 만들 수 있는 학생이 그리 없단 말인가. 응원가만으로 대학의 창의를 논하는 것은 비약일까. 대학은 모방의 정원일순 있어도 창의의 상아탑은 아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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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작가 이소연 作

특이하고 황당한 아이디어나 상상력을 가진 아이들은 대학에 갈 수 없다. 국가가 짜놓은 교과과정에 적응 못하고 경쟁에 밀려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한다. 생각 없이 열심히 공부한 아이들만 대학에 갔다. 그러곤 '자유라는 형벌을 선고' 받은 것처럼 대학이란 시공간을 낭비했다. 지식습득 능력은 우수했지만 지식창출 능력은 부족했다. 자유는 빈둥빈둥 노는 것이 아니라 뭘 할지 선택하고 집중하는 것이다. 진리는 학습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것이다. 자유와 진리가 없으니 시대를 이끌 창의도 없고 정의도 없다.

옛날 자유, 진리, 정의의 활용법은 군사정권, 기득권의 부당함과 싸우는 것이었다. 지금은 경제를 키우면서 삶을 풍요롭고 공정하게 만드는데 써야 한다. 과거엔 뜨거운 가슴과 논리만으로 충분했지만 지금은 경제적 창의가 중요하다. 창의가 부족한 것은 교수도 마찬가지다. 지식을 전달하고 직장에 취업시키는 것에만 급급했다. 외국의 첨단 산업 정책이나 글로벌 기업의 최신 비즈니스 전략을 소개하기 위해 밤을 새워 검색했다. 그들을 따라가자고 목소리만 높였고 급변하는 환경에서 창의를 기를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가르치지 못했다.

물론 과거 경제성장기엔 지식습득이 중요했다. 국가라는 거대한 공장을 돌리기 위해 적당히 교육 받고 말 잘 듣는 인적 자원을 공급하는 일이다. 지금은 세상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시대다. 웬만한 지식은 검색하면 알 수 있다. 경제침체기엔 지식습득에 집중하는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지식이 있어도 시키는 일만 하는 인재라면 무슨 소용인가.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창의적 전사가 필요하다. 지식이 부족해도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하는 학생에게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대학과 교육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월트 디즈니,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크버그, 샘 올트먼의 공통점은 뭘까. 대학을 중퇴했으나 새로운 미래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성공했을까. 입에 겨우 풀칠이나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학생이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연구와 실험,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 혼자보다는 협력해야 한다. 진심어린 토론과 비판은 필수다.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과정을 보라. 노벨상 논문은 6쪽에 불과하지만 교류하고 토론하고 가설을 만들고 증거를 찾는 과정이 있었다. 대학은 지식습득을 넘어 지식창출의 환경을 제공할 때 다시 창의의 시공간이 된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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