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창업자의 계절, 겨울이 없으면 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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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규 더벤처스 투자팀장

우연히 타고가던 버스 차장 너머로 신석정 시인의 '봄을 부르는 자는 누구냐'의 싯구가 보였다. 그렇다. 벌써 봄이 오고 있었다.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에게 봄은 '해방'을 의미하지만 창업자에게 봄은 '주주총회의 계절'을 의미한다. 무릇 정기주총이란 지난 일 년을 돌아보고 다가올 일 년을 준비하고, 미래 방향성을 확인하는 연례행사로, 주주가 1인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주식회사라면 반드시 개최하는 것이 원칙이다. 더벤처스는 1월 말 기준으로 총 259개의 초기 기업에 투자를 했는데, 이는 다시 말해서 이 시기에 259개의 주총 참석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물론 자본금 총액이 10억 미만이면 서면으로 주주총회의 결의를 대신할 수도 있고, 가끔은 긴 겨울잠에 빠진 건지 감감무소식인 기업들도 있기 때문에 투자한 모든 기업들의 숫자만큼 모든 주총에 참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피투자사들의 한 해를 함께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주총을 준비하는 창업기업만큼 투자사도 바쁜 시기임은 틀림없다.

지난 몇 년간 이 정신없는 주총의 계절을 지나오면서 느낀 바가 있다. 대개의 경우 해당 기업의 지난 해의 재무재표를 보면 그 기업의 성과를, 그리고 총회에서 예정된 중요 안건들을 보면 앞으로의 운영전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 팀이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것은 재무재표상의 숫자가 플러스냐 마이너스냐 하는 점은 아니다. 초기 기업 투자의 특성상 이 단계 기업들의 재무재표에 쓰여진 숫자들이 아름다울 확률은 매우 적다. 오히려 이 숫자들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를 바로 아는 것과 이를 전달하는 방식이 더욱 중요하다. 신뢰할 수 있는 재무재표는 창업자의 마음가짐과도 같기 때문이다. 또한 재무재표를 제대로 읽어 내는 창업자는 실패의 확률을 줄일 수 있다. 재무재표 상의 각종 수익성 지표들을 통해 유추해 낸 성공의 법칙은 향후 기업 성장의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하고, 재고평가손실, 대손상각비 등 누락하기 쉬운 요소들까지 꼼꼼하게 반영된 재무재표는 신뢰도를 높인다. 물론 스스로도 창업자였던 과거를 돌아보면 사업만으로도 정신없는데, 재무재표까지 치밀하게 챙기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창업자라면 적어도 이 주주총회를 준비하면서 가지는 1년간의 회고의 시기에는 각 숫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숨은 뜻을 파악하고 곱씹는 노력을 해야 한다. 많은 초기 기업이 실패하고, 창업에서 실패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공한다면 그 이유를, 실패를 한다면 그 이유를 우리 기업이 기록하고 있는 숫자들에서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의 확률을 높이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또 한가지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주주총회의 연간보고만큼은 잊지 않아야 한다. 초기 창업 기업이 주주총회를 생략했다고 해서 당장 엄청난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투자계약이야말로 창업자와 투자자간의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둘 사이는 투자를 하기 전보다 더욱 긴밀한 소통이 필요하고, 정기주총은 최소한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하게 투자사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과정 자체가 창업자 자신과 창업 기업에게 중요한 사업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주주총회는 꼭 개최하지 않더라도 미리 준비하면 서면결의로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업의 상황이 어려웠다고 해서, 혹은 자본 잠식 상태라고 해서 이 과정을 생략하는 것은 창업자로서 우리 기업의 지난 한 해를 반성없이 무책임하게 흘려보는 것과 다름없다. 잘 되든, 못 되든 주총을 준비하면서 재무재표를 들여다보고, 다음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주주들과 경영 상황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한 방법을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기업이 초기 단계일 때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지난 해는 창업 기업들에게는 유독 추운 겨울이었다. 신규 투자가 위축된 것은 물론, 시장 상황도 좋지 않았고, 금리도 올랐다. 기업 불경기로 인해 다수의 B2B 기업들도 거래처를 잃었고, 소비 심리도 꽁꽁 얼어붙어 소비재 기업들은 더욱 상황이 어려웠다. 어느 때보다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들을 전해 들었다. 그렇지만 어려운 시기는 늘 있어 왔고, 이 시기를 잘 극복해 낸 기업들이 오래 가는 기업들로 살아 남는 것을 현장에서 수없이 목격해 왔다. 그리고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한 기업들의 공통점은 철저한 자기 이해와 이를 바탕으로 한 미래 계획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겨울이 없으면 봄도 없다. 어느 기업이든 어려운 환경인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겨울을 어떻게 보내고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맞이하는 봄이 다를 수 있다.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은 온다. 지금은 봄을 준비할 때다.

더벤처스 투자팀장 엄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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