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국부 펀드를 활용, 반도체 감광액(포토레지스트) 1위 회사 JSR를 매수한다. 매수 금액만 9조원이 넘는다. 글로벌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공급망 재편에 대응, ‘자국 중심 공급 생태계’를 강화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일본 국부펀드 ‘산업혁신투자기구(JIC)’는 반도체 소재 기업 JSR를 약 1조엔(약 9조1200억원)에 매수할 계획이다. JIC는 이르면 올해 안에 JSR 주식 공개 매수를 시행하고 절차가 무리 없이 진행되면 내년 상장 폐지를 추진한다고 닛케이는 보도했다.
JSR은 현재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다. 시가총액은 6740억엔(약 6조1500억원) 규모다. 시가총액에 비해 높은 매수가는 JSR의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결과라고 닛케이는 분석했다. JIC는 5000억엔(약 4조6000억원)을 출자하고 4000억엔(약 3조6000억원)은 미즈호은행에서 빌릴 예정이다. 나머지 1000억엔(약 9000억원)은 다른 은행에서 조달할 방침이다.
JSR는 반도체 노광 공정에서 회로를 그릴 때 쓰는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세계 1위 기업이다. 시장 점유율은 28% 수준이다. 특히 첨단 반도체 노광 공정에 쓰이는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를 공급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업으로 손꼽힌다. EUV용 포토레지스트는 지난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3대 품목 중 하나로, 이 소재가 없으면 우리나라도 첨단 반도체를 양산하기 어려워 진다.
JSR는 최근 반도체 소재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전통 사업 분야인 합성 고무 부문을 매각했고 2021년에는 미국 포토레지스트 기업 ‘인프리아’도 인수한 바 있다. 인프리아는 무기물 기반 포토레지스트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유기물 대비 정교하고 내구성이 강한 회로를 형성하는데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JSR가 인프리아 인수 당시 유기물과 무기물 포토레지스트 시장을 동시에 노리는 전략으로 업계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JIC가 JSR를 매수하면 글로벌 반도체 소재 시장에서 일본 정부 입김이 한층 커질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전략 물자로 정한 반도체 분야에 국부 펀드를 활용해 투자를 확대한 것은 핵심 공급망 구조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시도로 분석된다.
닛케이는 “JIC는 공개 입찰을 거치지 않고 이례적으로 JSR와 직접 교섭했다“며 일본 정부가 경제안보 관점에서 JIC의 JSR 인수를 지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또 일본이 국제 경쟁력이 있는 반도체 소재 분야에 투자를 지속, 소재부터 제조까지 이어지는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은 지난해 자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일본 대표 기업 8곳이 협력해 세운 반도체 기업 ‘래피더스’는 2나노미터 첨단 공정을 목표로 인력 및 기술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 회사에 700억엔 보조금을 지원했다. 지난 16일 국무회의(각의)에서도 반도체 분야 제조 기반을 확충하고 인재를 육성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