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미리 가 본 미래]〈71〉미국은 어쩌다 반도체 제조 역량을 놓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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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최근 한·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의 통상 환경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의구심이 든다. 텍사스 인스투르먼트(TI), 인텔 등 한때 전 세계 최고의 반도체 제조 기술을 갖고 있던 미국이 어느 틈에 반도체 제조 역량이 유실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대만 때문이다.

1987년 대만에 설립된 TSMC는 반도체 위탁생산 혹은 '파운드리'란 새로운 사업 구조를 제시한 회사다. 생산 시설이 없거나 생산 설비를 추가 확대하는 데 부담을 느낀 반도체 회사들을 대신해 제품을 만드는 외주 생산 방식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것이다. 이런 독특한 사업구조를 가진 회사가 탄생하기까지 대만 정부는 각고의 노력을 했다.

대만 정부는 자국 기업 기술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국책연구기관(ITRI)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쌓인 지식과 기술을 민간으로 이전해 벤처기업 창업을 유도한 것이다. ITRI를 진두지휘할 수장으로 TI에 입사해 25년 경력을 쌓고 부사장까지 지낸 모리스 창을 임명한다.

모리스 창은 반도체시장에서 설계와 생산을 분리할 필요성이 크다는 점을 남들보다 빨리 파악했다. 당시 TI에선 여러 인재가 퇴사한 뒤 새로운 반도체 회사를 앞다퉈 창업하던 때였다. 더 많은 TI 소속 연구원이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만의 회사를 창업하고 싶어 했지만, 막대한 생산 설비 투자비용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는 점을 꿰뚫어봤다.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선 생산설비에 막대한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고, 이 점이 신규 창업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임을 파악했던 것이다. 실제 반도체 성능이 점차 향상하면서 이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장비도 많아졌고, 사양도 높아졌다.

이때 모리스 창과 대만 정부는 반도체 산업에서 전통적 사업 구조 틀을 깨는 방식으로 TSMC를 설립했다. 반도체 산업 핵심 업무는 크게 반도체 설계와 생산·조립, 테스트로 구분된다. TSMC가 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반도체 업체는 설계와 생산, 테스트까지 모든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생산 설비를 갖추지 않은 기업이 반도체를 만드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셈이다.

TSMC는 이 틀을 깼다. 생산 시설이 없거나 생산 설비 확장에 부담을 느낀 반도체 회사의 제품을 대신 만들어주는 위탁생산 업체로 승부를 걸었다. 반도체에 관심 있는 기업이 막대한 생산 설비 투자 없이도 반도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TSMC 새로운 사업모델은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는다. TSMC에 위탁생산을 맡길 경우 수많은 위험요인을 덜 수 있어서다. 반도체 공장이나 정보기술(IT) 자산은 시간이 지나면 노후화하고, 신기술 개발로 빠르게 낙후된다. 이뿐만 아니라 반도체 수요는 가변성이 커 수요가 갑작스럽게 늘다가 급감할 수도 있다. TSMC 파운드리 사업모델 덕에 반도체 기업은 위험 부담이 큰 반도체 공장 및 설비에 막대한 투자를 하지 않고도 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생산 설비 투자와 같은 고정비용이 늘어나는 건 그만큼 위험 관리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TSMC 설립 이후 많은 신생 기업은 생산은 TSMC에 위탁해 맡기고 자신들은 기존 반도체 기업의 제품과 차별화한 새로운 반도체 설계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TSMC가 제공한 환경 변화 덕분에 다양한 형태의 반도체 제품이 탄생할 수 있게 됐다. 오늘날 반도체 산업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TSMC 위탁생산모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은 반도체 제조 역량을 유실하게 된 것이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aijen@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