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70>대덕연구학원도시 계획 재조정

Photo Image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4월 19일 대덕연구단지를 시찰하고 있다.국가기록원 제공

“앞으로 대덕연구학원도시 사업은 과학기술처에만 맡겨 두지 말고 청와대 중심으로 국가 재정 규모를 감안해서 투자 계획을 재조정하시오.” 1976년 3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충남 대덕학원연구도시 건설 현장을 방문해 과학기술처로부터 건설 현황 보고를 받고 이같이 지시했다. 학원도시 건설 주관 부처인 과학기술처에는 날벼락 같은 지시였다.

과학기술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추진한 박 대통령이 왜 이런 지시를 했는가. 시작은 지난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월 중순 어느 날. 오원철 청와대 경제2 수석비서관이 과학기술처로 전화했다. “대통령께서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현장을 직접 돌아보실 생각입니다. 각하께 보고할 브리핑 차트와 함께 대덕 현장 회의실 준비 등에 만반의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청와대 과학기술처 담당은 경제1수석에서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으로 바뀐 상태였다. 대덕연구학원단지 건설사업도 당연히 오 수석 소관 업무였다.

최형섭 과학시술처 장관은 당시 해외 출장 중이었다. 장관을 대신해서 이창석 차관이 브리핑을 준비했다. 이 차관은 전체 투자 계획을 재조정하는 내용의 자료를 만들고 자신이 직접 대통령에게 브리핑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학기술처가 브리핑 준비를 해 놓고 기다렸으나 청와대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대덕 방문 일정은 차일피일 뒤로 밀렸다. 그런 가운데 그해 3월 3일 오후 필리핀과 대만을 방문한 최형섭 장관이 귀국했다. 최 장관이 귀국한 며칠 후인 3월 9일 오후 4시경 오원철 경제2 수석이 최형섭 장관에게 급히 전화를 했다. “대통령 각하가 내일(10일) 오전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현장을 시찰하시겠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현장 방문에 과학기술처는 비상이 걸렸다. 정부종합청사 19층 과학기술처 사무실에서 하루 업무를 마감하고 앉아 있던 전상근 종합기획실장(현 삼전복지재단 이사장) 책상 위 전화벨이 울렸다. 장관 비서관이었다. “전 실장님, 장관님이 급히 찾으십니다. 곧 오시기 바랍니다.” 장관실로 들어선 전 실장을 보자 최 장관은 뜻밖의 말을 했다. “전 실장, 지금 즉시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현장으로 내려가시오. 내일 대통령 건설 현장 브리핑 준비를 하세요.”

최 장관 지시에 전 실장은 난감했다. 전 실장은 그해 1월 초 최 장관에게 사의를 표명한 상태였다. 전 실장은 1급으로 9년을 일했다. 그는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과장으로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수립했고, 이어 기술관리국장으로서 과학기술처 출범의 산파 역할을 했다. 과학기술처로 자리를 옮겨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 서울연구개발단지 조성,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계획 등 굵직굵직한 과학기술 정책을 수립한 실무 주역이었다. 하지만 승진을 하지 못했다. 그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카 사위였다. 그런 사유로 차관 승진에서 매년 탈락했다.

“전 실장, 이유가 무엇이오. 왜 사퇴 결심을 한 겁니까.” 전 실장은 이유를 설명했다. 최 장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우선 갈 자리를 알아봅시다. 사표는 다음에 내도록 합시다.” 전 실장은 이후 자신이 담당해 온 업무를 하나씩 다른 사람에게 인계했다. 현안인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업무는 권원기 종합계획관이 맡다시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 장관이 “브리핑 준비를 하라” 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장관님, 이번 브리핑 준비는 이 차관이 직접 했습니다. 저는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차관이 직접 브리핑을 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러나 최 장관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전 실장이 브리핑을 하시오.”

전 실장은 최 장관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꼬이느라 담당국장인 권원기 종합계획관은 기술 이전에 관한 회의 참석차 영국 출장 중이었다. 담당인 서정만 과장도 일본 출장으로 지리를 비웠다. 전 실장은 최 장관이 넘겨준 브리핑 차트를 들고 한기익 사무관 등과 서둘러 대덕으로 내려갔다. 밤 9시가 지나 대덕에 도착했다. 전 실장 일행은 밤을 꼬박 새우며 브리핑 장소인 선박연구소 임시 사무실을 개조해서 회의실로 꾸몄다.

전상근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의 회고록 증언. “브리핑 차트를 보니 낯선 내용이 많았다. 특히 투자 계획은 생소했다. 많은 숫자가 나열해 있었지만 어떻게 그런 숫자가 나왔는지 근거를 알 수가 없었다. 등에 진땀이 흘렀다. '이거 야단났구나. 내가 모르는 내용을 어떻게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지금 내용을 고칠 수도 없고.' 시간이 촉박해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고민 속에 운명의 날이 밝았다.”(한국의 과학기술개발)

이튿날인 3월 10일. 대통령 방문을 앞두고 아침부터 선박연구소 주변 일대에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관들이 주변을 관리했다. 한기익 전 과학기술처 정책기획관의 회고. “대통령 도착에 앞서 검은색 지프가 당도했어요. 별 두 개를 단 장군이 지프에서 내려 현장을 지휘했어요. 알고 보니 전두환 당시 경호실 작전차장보(전 대통령)였습니다.”

잠시 후 박정희 대통령이 도착했다. 최형섭 장관의 안내로 박 대통령은 곧장 임시로 마련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최 장관이 일어서서 인사말을 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건설 현황은 전상근 종합기획실장이 보고드리겠습니다.” 전 실장은 앞으로 나가 인사한 뒤 차트를 한 장씩 넘기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전 실장은 1973년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계획이 청와대 회의에서 국가계획사업으로 확정한 이후부터 공사 진행 과정을 보고했다. 시작은 매끄럽게 넘어갔다. 다음 대목부터 문제가 생겼다. 전 실장은 막대한 사업별 투자 규모와 예산 산출 근거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전 실장이 브리핑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의 표정이 차츰 굳어졌다.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전 실장, 브리핑을 잠시 중단하시오. 지금 제시한 투자 계획의 산출 근거는 무엇이오?” “예 그것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최형섭 장관이 앞으로 나와 보충 설명을 했다. “각하, 그 돈은 연구학원도시가 완성할 때까지 드는 비용입니다. 연구소가 한꺼번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점진적으로 설립할 예정입니다. 당장 그 돈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1980년도 후반기 예산까지 포함한 막대한 액수의 투자 계획에 박 대통령이 놀란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대통령은 직접 지휘봉을 잡고 도시건설 계획의 문제를 하나씩 지적하기 시작했다. 배석한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회의장에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브리핑장에 배석한 한기익 당시 과학기술처 사무관의 회고. “대통령은 지휘봉을 들고 과학기술처의 건설 방향은 이상적이지만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예산을 감안해서 단계적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하셨어요. 진입로 도로 건설의 단계적 확대, 상수도 인입예정비 변경, 연구소 신설 등은 단계적 추진이 바람직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계획 기간에 '기반시설과 연구소 건설에 1100억원 투입은 우리 경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관계자들에게 질문도 하셨습니다. 사무관인 저한테도 '상수도 건설비가 어느 정도인가' 하고 물으셨어요. 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대통령은 40여분 동안의 브리핑이 끝나자 오원철 수석비서관을 찾았다. “오 수석, 이 사업은 청와대 중심으로 국가 재정 규모를 감안해서 투자 계획을 재조성하시오. 사업별 투자 우선순위를 정하고, 예산 형편에 따라 연차적으로 무리 없이 사업을 추진하시오.” 박 대통령은 공사 현장을 시찰하고 귀경했다.

전 실장은 그해 5월 13일 15년 동안의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전상근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의 회고. “나는 공무원 생활 15년간 브리핑은 탁월하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공직 생활 마지막 브리핑을 죽을 쑤어 버렸으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덕연구학원도시 사업은 과학기술처 손을 떠나 청와대 오원철 경제2 수석비서관이 주관했다. 오 수석은 곧바로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계획을 전면 재조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