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빅블러' 시대, 한국무역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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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기존에 존재하던 것들의 경계가 뒤섞이고 모호해지는 현상을 지칭하는 '빅블러(Big Blur)'가 상식용어로 자리 잡았다. 핀테크를 활용한 송금, 플랫폼 기반의 공유경제 모델인 우버(Uber), 온라인 배달서비스를 활용한 오프라인 매장 음식 배달 등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 경제 확산이 빅블러 시대 정착 이유로 설명된다.

이러한 경계의 모호화는 IT 기반 기술혁신과 신사업 모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와 산업 전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실물경제에서 유사한 영역이지만 각각 특성은 다른 것으로 인식됐던 무역과 통상, 공급망 분야에서 빅블러와 상호 연결성 확대라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역은 상품을 중심으로 한 국가 간 수출입, 통상은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한 다자간 무역자유화와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시장접근과 관세인하가 주요 논의 대상이었다. 또 공급망은 기업의 효율적인 생산 네트워크 구축과 운용에 초점을 맞추고 조달과 생산, 판매에 주안점을 둔 개념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무역 갈등 등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미치는 이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면서 이제 무역과 통상, 그리고 공급망을 개별 영역으로 인식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변화 조짐은 무역 분야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다. 상품 제조와 수출이라는 기존 패턴을 벗어나 인공지능(AI)과 스마트팩토리 등 첨단기술을 접목한 제품 서비스화로 고부가가치를 도모하는 트렌드가 정착되고 있다. 고부가가치를 추구하는 서비스 융합형 제품 등장과 함께 콘텐츠를 비롯한 무형재가 무역 대상에 포함되면서 외연이 크게 확장되고 있으며, 아마존을 비롯한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새로운 경로로 활용되는 등 무역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통상 분야도 마찬가지다. 자유무역 증진을 위해 상호 시장접근을 확대하고 관세를 인하하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 기후변화를 중심으로 한 환경과 노동, 기술, 공급망 등이 통상의 주요한 의제로 부상하면서 이제 통상은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전반 이슈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다. 올해 미국 주도로 추진 중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주요 의제에 무역원활화와 함께 공급망, 탈탄소 및 인프라, 부패 방지 등이 포함된 것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무역과 통상 분야에서 경계가 모호해지고 영역이 확장되는 현상 기저에는 공급망 이슈가 있다. 지난해 이후 각종 언론매체에 게재된 주요 경제 키워드를 분석하지 않더라도 공급망은 이미 일상화된 용어가 됐다. 팬데믹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차질이 관심을 높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가운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와 곡물 수급 차질, 미·중 무역분쟁 촉발된 주요 국가의 경쟁적인 공급망 내재화 정책 등 현재 진행 중인 글로벌 이슈 모두가 공급망 문제로 귀착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공급망을 바라보는 시각도 개별 기업 효율적인 생산·유통 프로세스 관리라는 경제성 측면에서 벗어나 경제 전반의 안정적인 운영과 지속성장 기반 확보라는 안정성 측면으로 전환되는 동시에 구매, 생산, 판매라는 개별 영역보다는 전체 프로세스의 안정적인 관리라는 전략 관점으로 바뀌었다.

무역과 통상, 공급망 분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상호 연결성 확대로 새로운 개념 정의가 이뤄지는 시점에서 한국무역의 방향성 또한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

중간재를 비롯한 상품 중심의 무역구조, 중국과 반도체 등 특정 국가와 품목에 대한 높은 의존도로 특징 지워지는 현재의 패러다임을 벗어나 서비스 내재화를 통한 고부가가치 융합형 제품 확대와 글로벌 통상이슈를 주도하는 전략 마련, 이를 뒷받침하는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 등이 시급한 과제다. 이러한 삼각구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운용할 콘트롤 타워 재설계가 현시점에서 화두다.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sanghyeon.jo@kit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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