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동기로 애완동물을 기르게 됐느냐고 물으면 흔히 사람은 배신하지만 애완동물은 끝까지 변함없이 주인을 사랑해 주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사실 필자도 앵무새와 거북을 한 마리씩 기르고 있다. 앵무새는 현관 열쇠 버튼 소리만 들어도 주인의 귀가를 감지하고 지저귄다. 마치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고 묻듯 주인의 손등에 올라타 주인을 응시하며 기꺼이 자기 부리를 주인의 입술에 맞대는 인사를 한다. 주인이 오랫동안 새장에서 꺼내 주지 않으면 질책하듯 손을 살짝 물기도 한다. 주인이 자주 말하는 단어들을 흉내내면서 그 단어들이 사용되는 맥락까지 학습하고 적시에 그 단어들을 발음해서 주인을 깜짝 놀라게 한다. 거북은 앵무새만큼 영리하지는 못하지만 그 둔해 보이는 몸으로 고개를 들어 주인을 응시할 때면 무언의 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로봇이라는 새로운 애완동물이 성큼성큼 우리 일상에 진입하고 있다. 그런데 로봇은 애완동물 역할뿐만 아니라 인간을 살상하는 킬러가 될 수도 있다. 얼마 전 일론 머스크는 2만달러짜리 인간형(휴머노이드) 로봇을 선보였다. 이 로봇의 생김새는 마치 사이버트럭의 첫 인상처럼 매우 엉성해 보였다. 배선들이 밖으로 비쭉 솟아나와 있고, 움직임도 국산 로봇만큼 세련되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그 로봇의 손과 수많은 센서에 주목한다. 마치 테슬라 자동차가 무선 연결을 통해 기능을 계속해서 업그레이드해 나가듯(최근에는 차량 문까지 원격으로 여는 기능을 무선 업그레이드로 제공했다) 이 로봇이 앞으로 사람들의 작은 필요까지 응대하도록 업그레이드될 것임을 예감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빨랫감을 세탁소에 넣어 주고, 어르신을 부축해 드리며, 음식을 집 앞 마당으로 갖다 주게 된다면 마치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하듯 로봇을 한 대 장만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로봇과의 공생 또는 공멸은 이제 선택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니라 반드시 다가올 미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드론, 지뢰 제거 로봇은 전쟁터에서 흔한 장비가 됐다.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무인 자폭드론에 의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다. 로봇이라는 자동화 기기가 인간의 생존을 가르는 전장에서 적극 활용되고 있는 아이러니는 결국 누가 어떤 의도로 로봇을 이용하느냐가 그 결과를 좌우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로봇에는 인간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기제가 없다. 1980년 광주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한 군인이 유족을 만나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사죄했다는 언론보도에서 보듯 인간에게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되짚어 보거나 자신의 비행(非行)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자기 피드백 기제가 있다. 하지만 로봇에는 그런 기제가 아직 미비하다. 이 부분이 바로 로봇의 배신이요, 기술의 배신이다.
머스크의 테슬라와 인간형 로봇이 공히 의존하는 기술이 있다. 바로 딥러닝이다. AI는 데이터의 숨은 패턴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오류를 점차 줄여 나갈 수 있는 자기조직적 지능을 갖추고 있다. AI가 결국 자책이라는 자기 피드백을 갖추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딥러닝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주입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궁극적 책임은 인간이 져야 한다. 로봇의 배신은 인간의 배신이며, 인간성(휴머니티)의 궁극적 수호자도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미 드론이 인간을 살상하는 전쟁 상황에서 그 뒤에 숨은 인간을 비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인간에게 인간성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로봇의 배신에 대한 답변이다.
김장현 성균관대 교수 alohakim@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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