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41)디지털 시대의 삶에도 '스토리'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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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화가 옌스 호닝은 1인당 평균 연봉에 해당하는 지폐를 캔버스에 가득 채운 작품으로 유명하다. 덴마크 북부에 있는 쿤스텐 올보르 현대 미술관도 그런 작품을 기대하며 약 1억원 상당의 지폐를 그에게 보냈다. 그런데 호닝은 지폐는 따로 챙기고 뭔가 뜯긴 자국이 있는 빈 캔버스만 액자에 넣어 미술관에 보냈다. 그가 붙인 작품의 제목은 '돈을 갖고 튀어라'였다. 하얀 캔버스를 둘러싼 텅 빈 액자만으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을 빙자한 사기에 불과한 것일까. 저임금 노동을 고발한다는 스토리를 입히면서 예술이 됐다.

추상 회화는 사람·꽃·동물 같은 자연이나 신화·역사·종교·인생 등 이야기를 그리지 않는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색채, 질감, 선, 면, 원이나 낯선 형태로 작품을 표현하기 때문에 스토리 없이 그림 자체에서 감동이 우러나온다. 원래 그림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보조 수단이다. 신화, 설화, 성경, 법과 도덕을 알기 쉽게 도와주는 삽화가 그 조상이다. 추상 회화는 삽화에 불과하던 그림을 거부하고 자신을 직접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미술사를 장식했다. 칸딘스키, 몬드리안,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는 스토리 없는 그림을 남겼다. 그러나 감동이 있다.

액자는 그림을 담는 역할을 한다. 그림과 실제 공간의 경계선이다. 액자에 담기지 않는 그림도 있다. 반대로 그림을 담지 않은 액자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디지털 화면으로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되면서 액자가 사라졌다. 그러나 액자가 그림을 버림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작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액자가 만들어 갈 스토리를 지켜볼 일이다.

인간 사회는 사람을 그 사람 자체만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실력·외모·인상 이외에 집안(부모)·학력·경력을 본다. 그것이 편견이고 평등에 반한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그 사람이 살아 온 행적에서 스토리를 찾아 평가한다. 결국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학력 위조, 논문 표절, 대리 시험, 봉사활동을 통해 스펙 등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소셜미디어에서의 삶은 어떤가. 삶의 디지털 노출은 우리를 가둔 액자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지만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종속화 과정을 걷는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다. 연예인, 정치인, 예술가들의 삶을 떠받치는 새로운 액자가 되고 만다. 결과는 불안, 공포, 소외감이다. 액자를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스펙을 쌓아 스토리를 만든다. 그게 옳을까.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면 안 될까. 그래야만 그 사람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첩의 자식 등 비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인재들이 버림받았다. 그들을 양반 사회를 떠받치는 액자로 만들고 그 가치까지 버림으로써 조선은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큰 손실이 아닌가.

음식 발전사를 봐도 그렇다. 유통기간이 짧은 생선, 고기, 채소를 먹기 위해 양념을 깊이 쳤다. 결국 양념 맛에 취해 식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지 못했다. 최고의 맛은 무미지미(無味之味) 라고 한다. 양념을 넣지 않고 식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식재료가 신선하다면 양념 뒤에 숨을 이유가 없다.

스토리를 찾는 문화가 스펙을 요구하고, 학력위조·논문표절·부모찬스를 낳는다. 우수한 인재도 양념에 갇혀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지 못한다. 데이터, 인공지능과 코로나19 팬데믹이 맞물려 일자리가 줄고 있다. 그 일자리를 두고 사람들이 경쟁하고 있다. 사람을 뽑는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과거 스토리를 걷어내고 사람의 참모습을 찾는 과정이면 어떨까. 스토리가 있는 사람보다 스토리를 만들어 갈 사람을 뽑는 과정이면 더욱 좋겠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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