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피그마'(Figma) 인수의 교훈

최근 스타트업계에서 가장 화제가 된 뉴스는 디자인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어도비'(Adobe)가 동종 스타트업 '피그마'(Figma)를 200억달러(약 28조7000억원)에 인수했다는 소식일 것이다. 어도비가 피그마를 인수하는 데 투입한 금액은 올해 피그마 예상 매출액의 50배에 이른다. 이 때문인지 인수 소식이 알려진 후 거액을 쏟아부은 어도비의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다.

정보기술(IT) 관련 회사에 근무하거나 디자인 업무를 하지 않는다면 피그마란 이름이 다소 생소할 수 있다. 반면 어도비는 '뽀샵'이란 별칭으로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소프트웨어 '포토샵'으로 유명한 회사다. 그런 막강한 제품을 보유한 어도비가 뭐가 아쉬워서 창업한 지 10년 된 임직원 800명 규모의 스타트업을 인수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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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비가 피그마에 '거액'을 쏟아부은 결정은 피그마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마냥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당장 필자 회사만 놓고 봐도 디자이너가 하는 작업 대부분이 피그마로 이뤄진다. 한 현업 제품 디자이너는 “어도비 입장에서 좋은 가격에 인수한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인수 자체는 잘한 결정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도비는 피그마의 어떤 면모 때문에 거액을 주고 인수에 나선 것일까.

피그마 이용자가 말하는 최고 장점은 작업한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협업'하는 데 몹시 편리하다는 점이다. 피그마는 인터넷에만 접속하면 곧바로 사용이 가능한 클라우드 기반이다. 소프트웨어를 사지 않아도 무료로 가입해서 사용할 수 있다. 링크만 보내주면 작업 결과물을 공유할 수 있고, 모든 작업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함께 작업하는 동료의 최신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조언해 줄 수가 있다. 기존에 디자이너가 사용하던 스케치나 어도비XD 같은 소프트웨어가 디자인 작업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피그마는 '협업'에 방점을 두고 있다. 협업 대상은 같은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개발자나 콘텐츠 업무를 하는 다른 팀 소속 비디자이너 구성원까지 포괄한다. 실제로 피그마는 '디자인 업무는 디자이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는 모토로 다른 회사 제품과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재택근무와 비대면 업무 처리가 일상화하면서 온라인에서 함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업툴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분석 주체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는 세계 협업툴 시장이 지난해 172억달러(24조7000억원)에서 오는 2028년엔 407억달러(58조5000억원)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마케츠앤드마케츠는 세계 협업툴 시장 규모를 지난해 472억달러(67조8000억원)에서 오는 2026년 858억달러(123조원)로 늘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세일즈 관리 소프트웨어 세계 1위 업체인 세일즈포스는 지난 2020년 IT업계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한 협업툴 '슬랙'을 277억달러(40조원)에 인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협업툴 시장이 사업체 규모나 비즈니스 성격 등에 따라 더욱 세분화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카카오워크'와 연구원, 공공기관 등을 타깃으로 한 '두레이', 스타트업과 대기업에 특화된 '잔디' 등이 두루 사용된다. 5월에 출시된 에이팀벤처스 카파 커넥트(CAPA Connect)도 '도면'에 특화된 협업툴이다. 업무 특성상 도면 공유 수요가 많은 제조업과 건설업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피그마가 단지 협업툴로만 차별화에 성공했다면 어도비가 200억달러라는 거금을 들여서 인수하진 않았을 것이다. 기술적인 부분은 후발주자도 벤치마킹해 더 좋은 품질과 싼 가격으로 경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그마는 여기에 더해 경쟁자가 따라오기 어려운 '해자'를 구축해 놨다. 바로 피그마 이용자와 기업이 서로 디자인 작업물을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다. 피그마 이용자는 회사 측이 제공하지 않는 기능을 맞춤형으로 제작해서 커뮤니티에 올려놓는다. 특히 다른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와 달리 이런 맞춤형 기능을 외부 툴 도움 없이도 피그마 안에서 손쉽게 제작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 특징이다.

완성된 기능은 다른 이용자도 플러그인 방식으로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다. 사용자는 그 과정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얻기 때문에 피그마를 한 번 사용한 사람은 점점 더 피그마에 빠져들게 된다. 피그마 사용자가 충성 고객을 넘어 점차 '팬'으로 변모해 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디자이너 사이에서는 벌써 어도비 인수로 인해 피그마의 혁신 면모가 퇴색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나온다.

어도비의 피그마 인수 건은 앞으로 시장에서 지배력을 갖는 기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피그마는 디자인 소트프웨어 시장에서 협업툴로 '차별화'한 뒤 개방형 커뮤니티를 구축해 사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냈다. 처음엔 남들과 다른 가치를 제공(차별화)했고, 다음엔 사용자를 우군으로 끌어들여서 회사 혼자 제공할 수 있는 가치 이상을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됐다. 피그마 '생태계' 구축을 통해 단순한 소프트웨어를 넘어 '플랫폼'화(化)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스스로 플랫폼이 되는 데 성공한 기업은 눈덩이가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듯 성장에 가속도가 붙고, 업종이나 규모와 상관없이 시장 지배적인 사업자가 될 공산이 크다. 디지털 혁신 전문가인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최근 저서 '플랫포노베이션하라'에서 플랫폼의 존재 이유를 '참여자의 가치 교환에 기반을 둔 상생'으로 정의했다. 피그마 역시 이상적인 상생 플랫폼을 만들어 낸 셈이다. 결국 디자인 소프트웨어 업계의 '공룡' 어도비가 피그마 인수에 나선 것은 이 '꼬마' 경쟁자가 조만간 티라노사우르스로 자라나리란 것을 알고 선제 대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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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에이팀벤처스 대표(kosan@capa.ai)

○고산 에이팀벤처스 대표는= 제조업체 매칭플랫폼 카파(CAPA) 서비스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대표다. 2007년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예비)후보로 선발돼 러시아 가가린 우주인훈련센터에서 우주인 훈련을 받았다. 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창업 지원 비영리기관인 타이드인스티튜트 대표,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인수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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