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남긴다(農夫餓死 枕厥種子)'라는 말이 있다. 현실은 배가 고파 죽을지언정 미래를 위한 종자만은 꼭 남겨두는 농부의 지혜는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올해 국가 R&D 예산은 2021년도 27조4000억원이였던 전년 대비 9.4% 증가했으며 꾸준히 증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며칠 전 발표된 내년 과기정통부 예산에도 18조8000억원이 편성되는 등 초격차 전략기술, 디지털 플랫폼 정부 등 정부가 주력하는 핵심 분야에 전폭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향후 글로벌 기술패권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대한민국만의 전략 무기를 만들려면 국가 R&D 중요성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번 칼럼에서는 국가가 투자한 만큼 성과를 거두기 위해 얼마나 실효성 있는 연구개발이 이뤄지고 있는지 진단하고 앞으로의 개선 방향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R&D(Research and development)는 우리말로 연구개발(硏究開發)로 번역된다. 국가경쟁력이나 도시경쟁력을 평가할 때 중요한 지표로 사용될뿐 아니라 국가 미래 먹거리를 위한 투자로 인식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 정부의 R&D 투자 규모는 세계에서 꽤 높은 선두 그룹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시의 R&D 투자 규모도 글로벌 도시 중 2~4위에 오를 만큼 높다.
이른바 '피하주사 이론(자극한 만큼 반응한다는 이론)'에 따르면 투입한 만큼 산출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결과만 따지면 우리나라가 과학기술 선진국 반열에 도달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연구와 개발은 실과 바늘과 같은데 실상은 연구 중심이고 개발은 매우 적다. 최근 주목받는 바이오나 첨단 신산업 분야도 예외가 아니고 전반적으로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를 찾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여기에 R&D 투자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금액 산정 기준이나 투자 분야에 대한 적정성 갈등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국가 R&D 투자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과 효용성 분석이 다시 필요한 이유다.
산학연 협력 R&D 생태계의 허와 실
학교나 연구원 같은 학계 중심으로 연구개발이 진행되다 보면 산업계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반쪽짜리 연구가 되거나 기업의 현장 수요에 맞지 않는 결과로 이어지는 한계가 늘 존재해 왔다.
학계나 연구원 중심 연구개발 흐름을 바꿔보고자 국내에선 1993년에 최초로 산학연협회를 구성하고 협력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산업계 혹은 민간 전문가가 주도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저 참가자 풀에 산업계를 추가했을뿐 실질적인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많다.
중소기업 단위의 자격만을 갖춘 회사를 탐색해 명의만 차용하거나 장비 구매 지출 등으로만 기업 역할을 한정하는 사례도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기왕 필요했던 장비인데 정부 R&D 예산으로 사준다고 하니 별다른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이 업계 불문율처럼 굳어졌다.
어디 그뿐인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각 정부 부처가 경쟁적으로 이른바 '잘 보이기 식' 사업 예산을 배치하는 통에 부처 간 R&D 사업 중복투자 폐해가 절정을 이룬다. 부처마다 세부 R&D 사업도 많다 보니 부처 간 겹치는 항목과 규모를 서로 파악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은 어떻게
최근 연구개발 트렌드를 보면 국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민간 주도, 성과 중심으로 R&D 정책의 대수술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역할은 어떻게 구분되어야 할까. 본래 정부는 기초연구를 지원하거나 사업의 위험성 때문에 민간이 투자하지 않지만 국가의 장래에 필수불가결한 사업이라면 지원을 해왔다.
기초연구를 수행하려면 끈기와 윤리의식이 요구된다. 시간이 오래 걸릴뿐 아니라 민간이 투자하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연구계에서는 원래 성공하기가 어려운 분야라는 이유로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껍데기뿐인 알맹이 없는 연구결과를 내놓기 일쑤다. 심지어 연구비를 받아 단순 인건비나 회의비로 지출하고 별 성과 없이 그냥 종료해 버리는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정부의 대응은 어땠을까. 효율적인 관리 감독과 개선 방안 마련에 늑장을 부렸다. 과도한 보고서를 요구하거나 절차만 늘리는 등 외양에 치우쳐 본질적인 해결책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연구 성과를 끌어 올리는 지원을 강구하기보다는 형식적 절차에 집착하는 모습이 강했다.
이 중 연구개발비를 어떻게 산출하고 감독하느냐 하는 부분은 세부적인 행정관리로 보이지만 실제 성과로 이어지는 데 중요한 핵심 항목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정부 방식은 인건비를 지급할 수 있는 대상자, 인건비 지급 여부를 따지는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현장의 불만도 커져만 간다. 정부가 불필요한 서류만 계속 요구하니 검증 관문을 쉽게 통과하는 요령만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산이 투자되고 보고서는 쌓이지만 정작 의미 있는 연구성과는 나오지 않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연구의 전후방 연결성의 단절도 고질적인 문제다. 기획이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연구 결과가 사업화로 이어지지 않아 속 빈 강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 민간 중심, 수요자 중심이 아닌 학계, 연구계의 공급자 마인드로 사업이 추진되다 보니 다양성과 현실성은 늘 제자리걸음이다. 수요를 조사하면서 업계 대표성을 갖지 못하는 이를 전문가로 초빙하거나 특정 회사에 유리한 방식으로 결과를 몰아가는 식의 특혜 시비도 흔하게 접하는 잡음이다.
국가 R&D 사업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자면 설문 방식을 통해 업계 수요를 다양하게 수렴하는 데서 출발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기업을 먼저 선정한 후 연구진 선정과 관리를 맡기는 것도 방법이다. 현장 수요를 잘 아는 기업에 주도권을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R&D 성과에 대한 재정의 필요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성과를 나타내는 지표에는 논문, 특허, 기술료, 사업화, 인력양성 지원, 연수 지원 등 여섯 가지 항목이 있다.
이 중 R&D의 성과 제고 혹은 '코리아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성과지표를 설계함에 있어 논문이나 특허 실적보다는 기술 이전이나 사업화 성과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연구비 관리 기관의 전문성과 연속성 제고는 국가 R&D 사업 품질 향상에 직결된다. 일부 기관들은 객관화를 추진한다는 명목 아래 외부 위원 중심으로 심사를 진행한다. 공정성 확보 측면에서는 바람직할 수 있으나 이 과정에서 특정 인맥과 학연, 사적 네트워크가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엄격한 관리가 요구된다. 연구개발에서는 객관성을 가장한 편향성은 극히 경계돼야 할 악덕이다. R&D 심사위원의 역할도 일회성 선정 심사에 그칠 게 아니라 연구 결과에 대한 후방 효과에 대한 책임감을 갖도록 하는 방법론도 검토할 수 있겠다.
정책적인 측면에서도 정책과 중장기 계획, 연구개발 과제 간 연계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기업체 수요 조사를 병행하면서 최적의 조합 모델을 찾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성과를 저해시키거나 리스크가 크고 도전적인 R&D 기피 현상을 우려해 단편적인 성과 평가에만 목표를 한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
찰스 다윈은 인류의 발전 경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아남는 종은 가장 강하거나 가장 영리한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반응하는 종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대한민국에 주어진 도전도 같은 맥락이다.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국가 R&D 사업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R&D 경쟁력의 잣대를 '투자의 규모'가 아니라 '내용의 규모'로 이동하는 발상의 전환을 기대한다. 빠른 행동과 함께.
임성은 서울기술연구원장 ych5534@sit.re.kr
<필자 소개>
임성은 원장은 서울시립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행정고시 출제·선정 위원, 서울특별시 연구실장 등을 역임했다. 서경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국책연구원 평가위원을 거쳐 현재 서울기술연구원장을 맡고 있다.